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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람들이 가벼운 맘으로…" '천사성금' 도둑 변호인의 말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경찰에 붙잡힌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경찰에 붙잡힌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어떤 맘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돌이켜 볼 때 무모하고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전주지법, 특수절도 2인조 결심공판 #'얼굴없는 천사' 6000만원 훔친 혐의 #검찰, 각각 징역 2년, 1년6개월 구형 #피고인 "재산도, 저축한 돈도 없다" #"선처해 주면 부모 잘 모시겠다" 호소 #변호인 "자백하고 반성하는 점 고려"

 지난달 31일 오전 전북 전주시 만성동 전주지법 203호 법정. 마스크를 쓴 채 법정에 나타난 A씨(36)는 최후 진술을 통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모한 일을 저지를 줄 몰랐다"며 "기부 천사와 노송동주민센터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옆에 있던 B씨(35)도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 죄송하다"고 했다.

 두 남성은 지난해 말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2인조 절도범이다. 전주지검은 지난 1월 특수절도 혐의로 A씨와 B씨를 구속기소 했다.

 검찰은 이날 전주지법 형사6단독 임현준 판사 심리로 열린 1심 결심공판에서 "피고인들은 익명의 기부자가 연말마다 성금을 두고 간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을 계획했다"며 "피해 금액이 6000만원이 넘는 데다 이 사건으로 지역 사회 신뢰가 무너지고 아름다운 기부 문화가 위축됐다"며 A씨에게 징역 2년, B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각각 구형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경찰에 붙잡힌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경찰에 붙잡힌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충남 논산과 공주 지역 선후배인 A씨와 B씨는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10시7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두고 간 성금 6016만3510원을 상자째 차량에 싣고 도주한 혐의로 기소됐다. 논산에서 컴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A씨가 무직인 B씨에게 범행을 제안했다.

 주범 A씨는 애초 경찰에서 "유튜브를 통해 '얼굴 없는 천사'의 사연을 알게 됐다"며 "컴퓨터 수리업체를 하나 더 차리려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A씨는 정작 부모에게는 "태국 여성을 데려다가 마사지(영업)를 하는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이날 법정에서 부모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토로하며 생계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 제가 지은 죄를 알게 됐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밖에 안 계셔서 재산도, 저축한 돈도 없다. 가족이 점포를 운영하며 생계비를 벌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번 일로 부모님께 큰 고통을 안겼다. 마음이 괴롭고 답답하다. 한 번만 선처해 주시면 사회에 나가 이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다. 범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살며 어머니와 아버지를 잘 모시고 사회에도 봉사하겠다"고 했다.

 변호인은 최후 변론에서 "이런 행동을 저질러서는 안 되지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들이 범행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전과가 없는 점, 훔친 6000여만원이 모두 반환된 점 등을 고려해 달라"고 했다. 두 사람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은 4월 14일 열린다.

지난 1월 2일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16만351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2일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16만351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A씨 등은 범행 당일 5시간도 안 돼 각각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붙잡혔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노송동 한 부부가 건넨 메모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경찰이 회수한 A4용지 상자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있었다.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노송동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지는 익명의 기부자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모두 21차례에 걸쳐 총 6억6850만4170원을 기부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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