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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n번방의 공모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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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너무도 끔찍하다. 보도된 내용만으로도 끝까지 보기가 힘들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미성년 피해자도 여럿이다.

박사 일당 ‘예외적 악마화’ 이전에 #음란문화, 사법체계 미비 돌아봐야 #성평등만이 디지털 성착취 근절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집단 성착취 동영상을 거래한 텔레그램 대화방 ‘박사방’ 운영자인 조주빈이 검거되면서다. 경제적 곤궁에 처한 피해자들을 알바 등의 미끼로 유인하고 신상을 털어 덫에 빠뜨린 후 ‘노예’로 칭하며 잔인한 성착취 영상을 찍었다. 오프라인 성폭행도 했다. 피해 여성들은 성적 노리개란 말로도 부족하다. 인격 아닌 돈벌이 수단, 재화였다. 조주빈이 대화방에 남긴 “도도한 애들 무너뜨리는 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핵심은 성적 쾌락만이 아니다. 한 존재를 철저히 짓밟으며, 그 세계의 왕으로 추앙받는 가학적이고 왜곡된 권력감. 사회적 공분이 들끓는 만큼 이번에는 제대로 처벌해야 한다. 어디선가 떨고 있을 회원들도 예외 없다. 관련 법 정비도 미룰 수 없다.

“소라넷의 처벌받지 않은 후예들이 박사들이 됐다”는 말처럼 그간 국내 디지털 성범죄·성착취는 국가의 방조 속에 만연했다. 17년간 100만 회원에게 불법 성착취물을 유포하며 악명을 떨친 원조 ‘소라넷’은 추징금 0원, 운영자 한 명 처벌에 그쳤다. 유사 사건이 잇따랐지만 법체계의 미비, 솜방망이 처벌은 여전했다. 막강 보안을 자랑하는 텔레그램이나 가상화폐 같은 디지털 기술까지 범행을 도왔다. 사회가 공모해 키워낸 것이 박사고 n번방이다.

조주빈은 검찰로 송치되며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출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분히 준비된 멘트였다. 어쩌면 스스로를 할리우드 영화 속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악당쯤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주빈을 ‘악마’ ‘괴물’이라 부르며 개인사에 집중하는 보도들에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수아 서울대 교수는 “가해자를 부각해 내러티브(서사)를 만들어 주는 보도가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 가해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또 일상화된 디지털 젠더 폭력의 문제를 ‘악마 가해자’라는 틀로 좁힌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예의 ‘피해자 행실론’이 나오는 모양이다. 일부 피해 여성들이 몸 사진을 올리는 트위터 ‘일탈계’에서 활동했다든지 ‘고액 스폰 알바’에 응해 빌미를 제공했다는 식이다. ‘야한 옷을 입어서 성폭행당했다’류의 해묵은 논리다. 그러나 스스로 노출 사진을 올리거나 ‘조건만남’에 혹했다고 이런 피해를 당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당해도 싼 피해자는 어디에도 없다.

조주빈의 악랄함에도 불구하고 박사방· n번방 사건은 예외적 악마 아닌 평범한 남성들이 ‘집단 놀이’하듯 낄낄대며 저지른 범죄다. 그리고 그 뿌리엔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가라며 성매매와 음란물에 관대한 성 문화가 있다. 누구든 처음엔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 아니겠는가. 『남자다움의 사회학』의 필 바커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최악의 지침서인 포르노가 가르쳐 주는 섹스로 무장하고 성관계에 나서는 최초의 세대”라며 “남자들을 위해 남자들이 만든 포르노”가 보는 이를 성적 측면, 대인관계 모두에서 실패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책에 따르면 포르노 산업의 규모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압도하며, 포르노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단어는 ‘teen(10대)’이고, 40%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사태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안 된다. 인터넷엔 아직도 “지난해 불법 유해 사이트 보안접속(https) 차단정책이 n번방을 낳았다” “차라리 성매매 합법화가 현실적”이란 얘기가 나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디지털 성착취의 근절은 성매매 합법화 따위가 아니라 오직 성평등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언제까지 외면할 셈인가.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