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경제위기 극복 명목 재정 풀기, 여당의 ‘꽃놀이패’ 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총선 이슈 블랙홀 된 재난지원금 

소득 하위 70% 가구에 지급하는 긴급재난지원금이 총선 민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사진은 대출 상담을 받기 위해 담당 기관 앞에 줄을 선 대구지역 소상공인들. [연합뉴스]

소득 하위 70% 가구에 지급하는 긴급재난지원금이 총선 민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사진은 대출 상담을 받기 위해 담당 기관 앞에 줄을 선 대구지역 소상공인들. [연합뉴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주부 오모(54)씨는 최근 스마트폰에 경기지역화폐 앱을 설치했다. 평소 디지털 친화적이라고는 할 수 없던 오씨가 20분 가까이 성가신 절차를 마다치 않고 앱을 깐 것은 ‘경기도형 재난기본소득’ 때문이었다. 지역 인터넷 카페에서 1인당 10만원씩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앱을 깔고 지역화폐카드를 신청해야 한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실제 지급 방법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오씨는 “정치적 이슈는 커뮤니티 카페에서 금기시되지만, ‘우리 동네 지역화폐 쓸 수 있는 곳은 여기’ 같은 반응이 올라오고 있다”며 “이런 분위기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해진다”고 말했다.

소득조회·지역화폐 사이트 마비 #기준·대상 불명확해 관심 더 폭주 #경제 실정론 내세우던 야당 곤혹 #“여당에 꼭 유리하진 않아” 분석도

나는 받나 못 받나 전국이 들썩

1인당 10만원에 관심이 이 정도인데, 한 가구(4인 기준)당 100만원이라면 오죽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발표한 지난 30일, 종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는 ‘소득 하위 70%’였다.

소득 하위 70% 기준은 대략 ‘중위소득 150%’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월 소득으로 환산하면 4인 가구 경우 712만원선이라지만, 단순히 월급 혹은 월수입만 따지는 것은 아니다. 근로·사업·재산·기타 소득 등을 합친 종합소득액과 부동산·전월세·예금·자동차 등 보유 재산을 따져 환산한 소득인정액을 본다. 이를 대략이라도 알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복지부 산하 사회보장정보원이 운영하는 ‘복지로’(www.bokjiro.go.kr)다. 이 사이트의 ‘복지서비스 모의계산’에 들어가 다시 ‘국민기초생활 보장’ 난에서 자신의 기본정보와 소득·재산 정보를 입력하면 대강의 가구 소득인정액이 계산된다.

청와대 발표 이후 이 사이트는 계속 접속 장애 상태다. 발표 다음 날인 31일 오전 11시 30분쯤 사이트에 접속하자 ‘예상 대기시간 9시간 49분, 고객님 앞에 10만6115명의 대기자가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원활한 서비스 운영을 위한 임시페이지를 개설했다는 안내가 무색할 지경이다. 사회보장정보원 측은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장애를 일으킨 것은 2010년 사이트 개설 이후 최초인 것 같다”고 말했다.

소동이 벌어진 곳은 이 사이트뿐만 아니다. 경기도 지역화폐카드 발급 신청도 감당이 힘들 정도로 폭증하고 있다. 지역화폐 사업을 담당하는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경상원)에 따르면 하루 4000건 정도의 발급 신청자가 이재명 지사의 발표 이후 하루 최대 26만명까지 늘었다. 60배가 넘는 증가세다. 하루 7000명 정도이던 홈페이지 방문자도 발표 다음 날인 25일 10만 명에 달했다. 접속량이 폭증하며 서버가 8번이나 다운되는가 하면, 카드 신청이 몰리는 바람에 배송이 지연되고 있다. 경상원 관계자는 “지난 4월 시작됐으나 크게 홍보가 안 됐던 지역화폐사업이 제대로 알려진 것이 뜻밖의 소득”이라고 말했다.

재난지원금에 묻혀버린 총선 이슈

4·15 총선 지지 정당 추이

4·15 총선 지지 정당 추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하기 전 보수 야당이 제기한 대표적 총선 이슈는 ‘경제 실정 심판론’이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자 정부의 ‘방역 책임론’이 커졌다. 해외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정부 책임론은 ‘코로나 선방론’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기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 재정을 풀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돈 풀기 이슈가 경제 실정 및 방역 책임론을 삼키는 양상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현상이 그대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가 치닫던 2월 중순,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견제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가 45%, ‘정부 지원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가 43%로 팽팽했다. 그러나 3월 하순 조사에서는 40대 46으로 역전됐다. 여론 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현재 격전지 여론조사에서는 대체로 여당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당은 고무돼있다.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며 곳간 열쇠를 움켜쥐는 관료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29일 당·정·청 회의에서 홍남기 부총리는 “소득 하위 70%까지 늘리려면 소득 구간에 따라 차등 지급이라도 하자”며 당에 맞섰으나 무위에 그쳤다. 홍 부총리는 결국 “기록으로라도 반대 의견을 남기겠다”며 대통령에 올라가는 보고서에 ‘부대 의견’을 담는 데 그쳤다.

보수 야당은 “매표 행위”라며 반발하지만, 묘수가 없다. 정책 집행의 칼자루를 쥔 쪽은 여당이기 때문이다. ‘재정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집행이 어려운 본예산 20%를 용도 전환해 100조원을 확보해 이를 자영업자·소상공인·근로자 등의 소득 보전을 하자”고 제안했다. 모처럼 나온 야당의 대안이었으나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다분히 감성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일축했다. “어떤 항목을 삭감할 건지 우리는 궁금하다. 조국을 지키는 국방비인지, 우리 아이들 미래가 달린 교육비인지, 또 아니면 아동수당과 어르신 기초수당인지.”

총선 끝날 때까지 중심 이슈될 듯

청와대가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 했지만,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은 설익은 채 발표됐다. 우선 소득 하위 70%의 정확한 기준선이 정해지지 않았다. 정확한 기준이 발표되고 나서도 문제다. 1만원 차이로 받는 소득층과 못 받는 소득층 사이에 역진성이 생기게 된다. 소득인정액을 두고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가령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사는 은퇴자는 받고, 맞벌이 부부는 못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어느 시점의 소득을 기준으로 할지도 논란거리다. 이런 문제들이 불거져 유권자들의 불만이 쌓이면 긴급재난지원금이 반드시 여당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논란 때문이라도 총선 기간 내내 재난지원금이 화제의 중심에 놓이는 것이 여권에 불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 문제가 경제 실정론, 방역 책임, 조국 문제 같은 여권에 불리한 이슈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총선 후 추경안 국회 통과를 거쳐 5월 중순쯤 지급될 가능성이 높다. 긴급재난지원금이 여권의 꽃놀이패가 될지, 뜻하지 않은 자충수가 될지, 정확히 2주 남은 선거판이 궁금하다.

현금성 재난지원금, 기본소득 논의 불 지필까

재난지원금 논의의 출발점은 ‘기본소득’이라는 용어였다. 평소 기본소득제 도입을 주장해온 민간 연구기관 ‘랩2050’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생계 문제를 ‘재난 기본소득’ 도입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했고, 이를 이재웅 쏘카 전 대표가 호응하면서 논의의 물꼬가 텄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이재웅 전 대표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이를 기다린 듯 여권에서 ‘묻고 더블’식으로 판을 키웠다. 김경수 경남지사의 ‘전 국민 100만원 지급’ 제안과 이재명 경기지사의 ‘전 도민 10만원 지급’ 결정으로 관심이 폭발했다.

그러나 정부는 긴급재난지원금을 결정하면서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는 극구 피했다. 우리 재정 수준이 기본소득 도입을 본격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는 인식에서다. 실제로 이번 재난지원금을 기본소득 성격으로 보기는 힘들다. 기본소득에는 ▶심사나 조건 없이(무조건성) ▶모든 구성원에게(보편성) ▶지속해서(정기성) ▶가구 아닌 개인에게(개별성) ▶현금으로 지급한다(현금성)는 원칙이 있다. 하지만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이나 일부 지자체의 지원금은 일회성인데다 지급 대상도 제한된다.

기본소득제 도입은 재원 외에도 따져봐야 할 문제가 다양하다. 기본소득은 진보의 전유물 같지만, 일부 보수에서도 관심을 갖는 제도다. 복잡한 복지제도 대신 이를 이용할 돈을 개인에 지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다. 진보 쪽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재난지원금을 기본소득과 연결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란만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계하는 이유다.

스위스·핀란드·네덜란드·캐나다 등 다수의 국가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이 실험되거나 논의됐다. 그러나 현실 적용 가능한 방안을 찾은 곳은 아직 없다. 이번 긴급재난지원금도 기본소득제의 실험장이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