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여성혐오 안 바뀌면 ‘n번방의 괴물들’ 계속 나온다

중앙일보

입력 2020.03.30 00:38

업데이트 2020.03.30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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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무엇이 문제인가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운영진들이 지난 25일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와 가담자·구매자 전원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운영진들이 지난 25일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와 가담자·구매자 전원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쇼크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미성년자 등에 대한 성 착취 촬영물을 텔레그램에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구속되면서다. 조주빈의 신상공개와 함께 국회에선 ‘n번방 재발 방지 3법’을 입법하겠다고 나섰다. 이렇듯 n번방 문제에 대해 사회적 공분이 일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번 사건이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9개월 간 잠입 취재한 대학생들
“너무 충격…추적 멈출 수 없었다
촬영물 ‘n차 피해’로 번지는 중”
‘성 착취’부터 명확하게 정의해야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끔찍한 집단적 가학 행위를 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인격 살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과거 모습을 재연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디지털 성범죄의 고리를 끊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n번방 촬영물,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텔레그램 n번방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는 두 명의 대학생이었다. 지난해 7월 텔레그램 잠입 취재를 시작한 이들은 하루 5시간 이상 취재한 결과를 경찰은 물론 언론사들과도 공유했다. ‘대학생 추적단 불꽃’이란 이름으로 활동 중인 두 사람을 만났다.

n번방 문제를 세상에 알린 ‘대학생 추적단 불꽃’이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익명으로 활동 중이다. 정유진 인턴기자

n번방 문제를 세상에 알린 ‘대학생 추적단 불꽃’이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익명으로 활동 중이다. 정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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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텔레그램 대화방들 가입자가 26만 명이라는데.
“단순 합산이 그렇다는 거다. 가해자 한 사람이 대화방 여러 개에 들어가 있으면 실제 숫자는 그보다 적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숫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문제의 성 착취 촬영물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하다. n번방의 불법 촬영물들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몇천 명 있는 대화방에서 알집으로 공유되기도 하고….”
어느 정도나 퍼졌다고 보나.
“해외 사이트에도 올라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n번방 자료 구해요’라고 글을 올리고, 돈 받고 팔고, 다른 불법 영상과 교환하기도 한다. 1, 2차 피해를 넘어 그야말로 ‘n차 피해’로 커지는 상황이다. 확산을 어떻게 막을지 지금이라도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취재를 9개월 넘게 계속했는데.
“너무 어린 아이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이름과 무슨 학교, 몇 학년 몇 반까지 나오는 학생의 촬영물을 올려놓고 ‘내가 1번’이라며 강간을 모의하기도 했다. 지인능욕방(지인 사진 합성 음란물 대화방)은 한 사람이라도 피해를 줄이려고 피해자들에게 알려드리기도 했다.”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n번방 사건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버닝썬 사건도 있었고…소라넷 운영자도 징역 4년에 그쳤다. 1980, 90년대는 불법 비디오테이프만 없애면 됐지만, 지금은 파일로 퍼져나가 피해가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 너무나 심각한 범죄다. ‘우리는 그냥 봤을 뿐이다’ ‘우린 박사와 다르다’ ‘왜 야동 본 것 갖고 난리냐’고 한다. 그들도 분명한 범죄자들이다.”
현재의 언론 보도에 대해선.
“너무 박사(조주빈)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박사가 죽일 놈인 건 맞지만, 아직 수많은 가해자들이 있다.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피해자들을 무력한 존재인 양 다루거나 당할 만했다는 식으로 박스에 가둬놓는 느낌이다.”
추적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확인한 불법 촬영물 대화방만 100개가 넘는다. 그런 방들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 모른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남성들 몇 명이 휴대폰 보고 낄낄대고 있으면 자리를 피하게 된다.”

성매매 후기, n번방과 다른 게 뭔가

텔레그램에서 불법 촬영물을 올리고 ‘품평회’까지 한 것은 익명성이 보장되고 들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텔레그램의 성 착취물 수요자들은 보안성이 강한 또 다른 플랫폼이 생기면 그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온라인에서는 n번방 못지않은 디지털 성범죄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지난해 7월 국내 최대의 성매매 알선 사이트 ‘밤의 전쟁’이 폐쇄됐다. 사이트 운영진은 5년간 2600여개 성매매업소에서 매달 30만~70만원을 받고 광고를 게시하는 수법으로 200억 원이 넘는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놀라운 것은 ‘밤의 전쟁’ 회원 수가 70만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루 접속 인원은 10만 명으로 성매매 후기로 올린 글만 21만개에 달했다.

업주들이 여성 얼굴과 몸을 찍어 홍보물로 만드는가 하면, 회원 후기엔 ‘인증샷’이라며 불법 촬영물들이 올라왔다. ‘밤의 전쟁’ 폐쇄 후에도 비슷한 사이트들이 생겨나 성업 중이다. 폐쇄형 사이트 ‘다크웹’에서도 아동·청소년 불법 촬영물이 무차별적으로 유통돼 경찰이 단속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들이 가리키는 것은 여성 혐오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의식과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박사’ ‘갓갓’ ‘와치맨’ 같은 괴물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 착취는 문제이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 착취는 문제가 아닌가. 성매매 후기가 n번방과 다른 게 무엇인가. 여성 혐오라는 본질은 같은데, 우리는 왜 다르게 반응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한 분노’

이은의 변호사는 이번 기회에 ‘성 착취’ 개념부터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건이 터질 때만 이슈가 폭발했다가 가라앉으면 피해자들이 불안한 토대 위에서 싸우게 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성 착취라고 볼 것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법적 가이드라인이 생긴다. 엄벌한다면서 졸속 대책 내놓고 끝내지 말고, 다양한 층위와 상황을 놓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성 착취 문제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 변호사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꾸준한 분노”라고 했다. 그렇다. 그때그때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반짝 대책’을 내는 데 급급했던 사회적 대응이 디지털 성범죄를 양산해온 토양이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우리의 분노가 정의로우려면 스스로의 의식까지 의심해보는, 냉정하고 집요한 분노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한국 사회는 보다 안전해질 수 있다.

50대 남성 법조인들…"사건 파악부터 제대로 하라"
국회 법사위 문제발언은 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무지하거나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국회와 법조계의 모습이다. 상징적인 장면이 지난 3일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있었던 ‘텔레그램 성범죄 국회 청원’ 토론이었다.

국회의원과 법원행정처·법무부 책임자들 사이에 딥페이크(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한 합성 음란물)를 놓고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일기장에 그림 그리는 것까지…” 같은 대화가 오갔다. 대학생 추적단 불꽃은 인터뷰에서 “일기장 그림이란 말에 큰 충격과 함께 무력감까지 느꼈다. 입법하시는 분들께서 사건 파악부터 제대로 해달라고 호소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법사위의 토론자들은 형벌을 남발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비유들에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무감각만 두드러졌다. 그 이유가 뭘까. 이은의 변호사는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젊은 여성일수록 피해가 크다”며 “디지털 성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계층은 피해자들이 3도 화상과도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걸 실감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회의원과 판·검사는 견고한 조직 안에서 피해에 노출될 일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 심각성을 체감할 수 없다. 법사위에서 문제 발언을 했던 이들은 모두 50대 중·후반의 남성 법조인들이었다.

법원이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경찰 역시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왔다. 한 20대 여성은 텔레그램 지인능욕방에서 자신의 얼굴 사진이 합성된 음란물을 확인하고 신고했으나 경찰로부터 “텔레그램은 잡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피해자가 직접 추적에 나선 끝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선 입법·사법·수사기관에서 구성의 다양성 문제가 선결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권석천 논설위원

모비온

Innovatio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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