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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인질 아니다"···몸은 이 당 맘은 저 당, 비례대표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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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 국회의원 박주현(가운데), 이상돈, 장정숙이 4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철수 후보가 비례대표 3인을 볼모로 잡고 있다"며 인질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비례대표 국회의원 박주현(가운데), 이상돈, 장정숙이 4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철수 후보가 비례대표 3인을 볼모로 잡고 있다"며 인질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비례대표는 인질이 될 수 없다.”

2018년 2월 박주현 당시 국민의당 최고위원이 민주평화당에 합류하면서 안철수 대표에게 한 말이다. 안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자신의 ‘제명’을 의결해 당적을 바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다. 현행법상 비례대표 의원이 소속 정당을 자진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한다. 요구가 무산되자 박 의원은 이후 2년여간 당적은 바른미래당에 두고 활동은 민주평화당에서 했다.

◇비례 13인 굴곡진 4년=박 의원뿐이 아니다. 그와 함께 평화당에 합류했다 대안신당을 거친 장정숙 의원, 사실상 무소속으로 활동한 이상돈 의원까지 3명은 20대 국회 후반 내내 당적과 활동이 불일치해 ‘호적 다른 3인방’ 등으로 불렸다. 지난달 제3지대 3개 정당(바른미래당·대안신당·민주평화당)이 차기 총선을 앞두고 다시 ‘민생당’으로 합쳐지면서 이들의 당적 문제가 해소됐지만, 그간 정치권에선 옛 국민의당 비례대표들의 순탄치 않은 행보가 많은 뒷말을 낳았다.

이상돈 의원 등 9명이 겪은 ‘셀프 제명’ 파동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19일 바른미래당에서 나가고 싶은데 의원직을 버릴 수 없는 9인(김삼화·김중로·김수민·신용현·이동섭·이상돈·이태규·임재훈·최도자)이 의원총회에서 자신들의 제명을 의결하고, 당적을 옮긴 일이다. 법원이 가처분 신청에 대해 “자신에 대한 제명 결의에 직접 참여한 경우 그러한 결의에는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가 존재한다”고 판단하면서 이들은 한 달만에 원대복귀했다.

바른미래당 이동섭, 김삼화, 김수민, 신용현, 이태규 임재훈 김중로 의원이 18일 오전 국회 의사과에 제명서를 접수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20200218

바른미래당 이동섭, 김삼화, 김수민, 신용현, 이태규 임재훈 김중로 의원이 18일 오전 국회 의사과에 제명서를 접수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20200218

결과적으로 4년 전 13명이던 국민의당 출신 비례대표들은 우여곡절 끝에 뿔뿔이 흩어졌다. 셀프제명 해당자 중 6명(김삼화·김중로·김수민·신용현·이동섭·임재훈)은 두 달 남은 의원직을 버리고 미래통합당행을 택했고, 역시 의원직 포기자인 1명(이태규)은 안철수 전 대표가 돌아와 다시 만든 국민의당으로 갔다. 나머지 2명(이상돈·최도자)이 셀프제명에 참여하지 않은 4인(박선숙·박주현·채이배·장정숙)과 민생당에 남았다.

◇비례 재선 도전 ‘러쉬’=비례대표 당적이 국민의당→바른미래당→민생당으로 2번 바뀌는 동안 13명 중 6명만 의원으로 남게됐다. 그런데 이 중 최도자(7번)·장정숙(5번) 의원은 민생당 비례대표를 신청해 순번을 받았다.박주현 의원은 당선권 밖인 11번을 받은 뒤 공천 신청을 철회했다.현역 비례대표 신분으로 ‘비례 재선’을 노린 거다. 동료 박선숙(18대·20대) 의원 등 비례 재선 선례는 간혹있지만 비례 연임 시도는 이례적이다. 비례대표로만 5선(11대·12대·14대·17대·20대)을 김종인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 정도가 비례 연임에 성공한 사례다. 소수자·전문가 국회 진출이라는 비례대표제 도입 취지를 보호하려는 정치권 관례 때문이다.

동료 의원에게선 쓴소리가 나왔다. 채이배 의원은 “정치 신인, 또 다른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진출 통로를 기득권 가진 현역이 막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일부 의원들이) 자신들의 재선을 위한 발판으로 비례대표를 활용하려는 게 아쉽다”고 25일 말했다. 그는 이날 차기 총선 불출마 뜻을 밝혔다.

이태규 의원(오른쪽).과 권은희 의원이 지난달 28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기자회견이 끝난 뒤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규 의원(오른쪽).과 권은희 의원이 지난달 28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기자회견이 끝난 뒤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제3지대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국민의당 시즌2'로 간 이태규 의원 비례 2번을 꿰찼다.새로운 당을 급히 만들어 같은 당에선 비례연임이 사실상 불가능한 정치권의 관례를 뛰어넘은 케이스다.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과 정운천 미래한국당 의원은 지역구에서 비례대표로 전환해 재선을 노리는 희귀한 경우다. 재선을 위해 권 의원은 광주 광산갑, 정 의원은 전북 전주을을 떠났다.더불어민주당의 외곽 비례당인 열린민주당에선 18대 통합민주당 비례대표였던 김진애 전 의원이 1번으로 공천을 받았다.

◇민심 왜곡…21대 재현 우려=20대 국회는 거대 양당(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 독식을 다소 벗어난 3당 체제로 출범 초기 주목받았다. 특히 비례대표 투표에서는 유권자들이 여당인 민주당(25.54%)보다 국민의당(26.74%)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두 당은 똑같이 13석을 확보했지만, 제3지대 비례 의원들은 “‘나를 쳐주오’ 코미디 같은 비례대표 출당 요구”(민생당 당직자)등을 연출하며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중도층에서 “이러라고 정당투표를 국민의당에 했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다당제 도입을 기치로 한 21대 국회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 증폭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거대 양당의 편가르기 정치로 제대로 된 중도가 설 땅이 없어졌는데, 이번엔 (비례) 위성정당까지 등장해 또 그렇게(양당 중심)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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