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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방치된 선거를 그냥 견디라는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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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온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멈춰서고, 수많은 일상과 일정들이 증발하거나 미뤄진 지금, 우리가 한 번도 심각하게 선거의 연기나 최소한의 일정 변경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선거 연기라는 말을 먼저 꺼낸다는 것은 어차피 실현되지도 않을 일에 감당할 수 없는 역풍만 불러오게 되는 일인지라, 아마 정부나 언론, 어느 정당 정파에서도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을 생각했을 때, 그까짓 선거, 그냥 눈 딱 감고 “해치워 버리자”는 마음이 팽배한 것도 사실이다. 그야말로 선거를 “견뎌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총선 준비 방역으로 끝나지 않아 #참여·캠페인·참정권의 문제 등장 #역풍 불까 침묵 말고 일정 조정과 #투표 조력 방안 등 적극 강구해야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은, 4월 15일로 예정된 선거일은 선거법이 규정한 바, 20대 국회 종료 시점(5월 31일) 50일 이전의 첫 수요일이라는 점이다.(34조 ①항) 그러나 선거법은 동시에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선거를 실시할 수 없을 때 대통령이 선거를 연기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196조 ①항) 나는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 선거를 치르기 힘든 “천재·지변”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선거 연기나 일정 조정이 있더라도 최소한 5월 31일 이전 차기 국회 임기를 시작할 수 있다면 헌정질서 중단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일정에 대한 첫 번째 우려는, 당연하게도 선거와 투표라는 활동이 이제 약간 수그러드는 기미를 보이는 바이러스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전파경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이것이 기우로 끝나면 좋겠고 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방역과 소독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평소 접촉할 일이 없는 랜덤한 사람들이 모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연이어 밀폐된 기표소에 드나들면서 앞사람이 썼던 기표용구를 받아쓰는 과정은, 우리 정부가 권장하는,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거리두기”에 확연히 역행하는 일이다. 후세의 역학전문가들이 자세하게 평가할 일이겠지만, 이란이 2월 하순에 치뤘던 총선이 바이러스 전파의 주요 경로였다는 주장도 뒷맛이 쓰다.

그러나 방역의 차원보다 열배는 더 심각한 문제가 이번 선거가 이미 “실패한 선거”로 귀결될 가능성이다. 선거라는 것에는 승리와 패배만이 있고 성공과 실패는 의미없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정치공동체의 대표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 날짜를 정하고 표를 모아 센다고 그냥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투표참여가 상당한 비용과 리스크를 감수하는, 따라서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 돼버린다면, 이번 선거는 현저하게 낮은 투표율과 매우 강한 당파적 유권자들이 과대대표되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 양당제가 포괄하지 못하는 중도층의 다양한 시각과 요구가 활발하게 분출되었던 지난 20대 총선과 비교해 본다면, 이번 선거는 양당 독점체제를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군소정당을 보호하는 선거제도를 새로 만들어 놓고서는 이를 역주행하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거대 양당의 행태가 가능한 것도 이런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이 현재 선거 일정에 아무 불만이 없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신성한 과정이 투표 당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본령이 유권자와 정당·후보 사이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캠페인이라는 의미에서도 이번 선거는 실패로 치닫고 있다. 후보자들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채 유권자들과 악수도 하지 못하는 캠페인, 정당의 이름도 모르고 기호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곳에서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착즙하는 선거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성공을 바랄 수 있을까. 후보자와 유권자들이 견디기에 영겁과도 같은 14일의 선거기간이 될 것이다.

참정권 제한의 문제도 심각한 것은 마찬가지다. 확진자, 자가격리자 등이 어떻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며, 등록된 숫자만 17만을 넘는 재외유권자들의 참정권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또한 듣지 못했다. 처음으로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 아직 개학도 하지 않은 18세 고교생들은 잊혀진지 오래다.

선거를 무작정 미루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겠고 5월이 된다고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선거일을 2,3일 간으로 늘리거나, 지금은 이틀로 한정된 사전투표 기간을 대폭적으로 늘리는 방안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확진자, 격리자들을 위한 거소투표나 한동안 사라졌던 우편 부재자 투표 등도 불가능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선거를 이렇게 방치하고 유권자들에게 그저 견디라고 말하는 것, 그저 마스크를 쓴 채 출두해서 누군가를 위해 기표하라고 말하는 것, 혹은 안 나와도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선거는 참고 견뎌야 하는 의무이기 이전에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야 지나가겠지만 4년 임기의 21대 국회는 남아있을 것이다. 정부 당국, 정당과 언론의 긴급한 토론과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