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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신소재 벤처엔 믿고 기다리는 투자자 있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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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소·부·장 벤처 ‘서남’ 문승현 대표

한 해 매출이 수십 억원 정도인 조그만 벤처다. 흑자를 낸 적도 없다. 그런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하겠다는 데 기관투자자 1313곳이 몰렸다. 투자자들이 얼마나 관심이 있을지 두드려보는 ‘수요예측’ 절차에서였다. 그중에 271곳은 외국 기관이었다.

소재 최종 상품화에 많은 시간 걸려 #2004년 창업하고 16년 만에 상장 #“끊길 듯 하면서도 계속 투자 이어진 #나는 억세게 운 좋은 벤처 CEO”

벤처는 상장주식 공모 가격으로 2700~3100원을 원했다. ‘희망 공모가가 소박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수요예측에 참여한 기관투자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692곳이 “3100원보다 더 주고 사겠다”고 손을 들었다. 결국 공모가는 희망 가격 최상단인 3100원으로 확정됐다. 벤처 ‘서남’은 그런 과정을 거쳐 지난달 20일 상장했다.

서남은 소재 업체다. 주력 제품은 ‘고온초전도 선재’다. 이름조차 어렵다. 이걸로 ‘초전도 전력선’을 만들면, 지금의 구리 전력선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전력 손실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는 초전도 전력선이 구리선을 대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땐 고온초전도 선재 수요가 폭발한다. 투자자들이 서남에 주목한 이유다. 국내에서 고온초전도 선재를 만드는 회사는 서남뿐이다. 세계적으로도 경쟁 상대가 별로 없다.

문승현 서남 대표가 자체 생산한 고온초전도 선재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최근 상장해 확보한 자금 대부분을 생산설비 확장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문승현 서남 대표가 자체 생산한 고온초전도 선재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최근 상장해 확보한 자금 대부분을 생산설비 확장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초전도 선재 수요는 최근에야 슬슬 싹트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한국전력이 경기도 용인시 흥덕변전소와 신갈변전소 사이를 초전도 케이블로 연결했다. 서남의 소재를 재료로 LS전선이 만든 초전도 전력선을 깔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를 ‘세계 최초의 초전도 케이블 상용화’라고 백서에 공식 기록했다. 그러고 뒤이어 지난달 코스닥 상장까지. 서남 창업이 2004년이었으니 16년 만이다. 서남 문승현(56) 대표는 “창업할 때 8, 9년이면 상장하리라 예상했는데 많이 늦었다”라고 말했다.

왜 늦어졌나.
“고온초전도 선재를 빠르게, 싸게, 길게 만드는 공정기술 개발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창업 10년쯤 지난 2010년대 중반에야 나왔다. 그렇게 개발한 기술은 해외 학회에서 초청 강연을 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래도 시장은 안 열렸다. 초전도 전력선 시장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잘 모르긴 하겠는데…. 전력 산업은 ‘안정’이 최우선이다. 전력 산업계 쪽에서 검증에 또 검증을 하다 보니 늦어진 것 아닐까.”
돈을 못 벌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버텼나.
“여러 차례 투자를 받은 게 총 430억원 정도이고, 정부 연구비를 250억원가량 받았다.”
투자 유치가 상당히 많다.
“주위에서 ‘억세게 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투자한 뒤 상장까지 15, 16년이나 기다려 줄 벤처 캐피털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히 우리도 투자자 손바뀜이 꽤 있었다. 그때마다 받아 줄 투자자가 나타났다. ‘시장이 아직 생기지 않아서 그렇지, 저 회사 기술력은 괜찮다’고 평가했던 것 같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적은 없었나.
“원료 대금을 못 줘 맨날 전화 오고 각서 쓰던 때가 있다. 돈이 떨어져 직원 월급이 밀리기도 했다. 창업할 때 ‘적어도 월급은 제때 주자’고 마음먹었는데…. 뛰어내리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 있었다.”

문 대표는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기업 연구소에서 고온초전도 분야를 연구하다 벤처를 차렸다. 초전도 소재가 가능성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창업 후엔 개발, 개발, 또 개발에 매달렸다. “여러 해 동안 주 7일 근무는 기본이었다”고 했다. 회사에 야전 침대도 갖다 놓았다. 심지어 들어갔던 건물이 팔려 옆에서는 내부 공사한다고 쾅쾅거리는데도 밤낮으로 개발을 했다. 문 대표는 “어느 날 밤 12시에 퇴근했는데 새벽 3시에 직원이 ‘힘내세요. (일부 공정 개발에) 성공했습니다’라고 문자 보냈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주 52시간제 때문에 이젠 그렇게 밤샘 R&D에 매달릴 수 없지 않나.
“제도가 그러니…. 사실 연구에 푹 빠진 사람은 주 52시간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규정이 있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게 더 어렵다.”
회사가 외진 곳(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성은리)에 있다. 인력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기술력을 알아 주어서인지 연구직은 뽑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언어와 급여 수준 때문 성사된 적은 없지만, 미국·유럽에서도 연구직 취업 문의가 온다. 반대로 생산·경영관리는 채용이 정말 힘들다.”
벤처들이 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지 않나.
“글쎄…. 우리나라에서 누가 신소재 벤처 하겠다면 뜯어말리고 싶다. 신소재는 그걸로 다시 제3자가 신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소비자에게 직접 가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라서 돈을 벌기까지 가는 길이 훨씬 험하고 오래 걸린다. 그런데 국내에는 충분히 기다려 줄 벤처 캐피털이 많지 않다. 신소재 벤처를 육성하려면 인내심 강한 투자자가 필요하다.”

이런저런 일 다 헤치고 벤처의 꿈인 상장을 이뤘다. 상장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공모주 청약이 지난달 10~11일이었다. 코로나19가 주식시장을 덮치기 직전이다. 만일 조금만 늦었다면 청약이 순조로웠을 리 없다. 한국거래소가 열어주는 ‘상장 기념식’도 서남이 마지막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그 뒤로는 모두 취소했다.

상장 직후 서남의 주가는 4750원까지 치솟았다. 공모가(3100원)보다 53% 높다. 그러나 잠시뿐. 코로나19 앞에 장사 없었다. 최근 좀 회복했지만, 한때 주가가 1560원까지 곤두박질쳤다.

주가가 신경 쓰일 것 같다.
“상장할 때 주변에서 ‘매일 주가 쳐다보지 말라’고 하더라. 장기적인 면에서 기업 가치를 올리는 데 신경 써야겠지만, 매일 바뀌는 주가를 내가 들여다본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특히 요즘 같은 때엔…. 그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R&D·생산·마케팅·영업이 잘 돌아가게 하는 거다.”
정말 주가를 보지 않나.
“안 보려는데…. 매일 보게 되더라.”
이제 상장했는데 나이가 적지 않다(56세). 5년, 10년 뒤에도 계속 CEO로 남아 있을 건가.
“상장을 계기로 회사의 연속성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오래 남고는 싶다. 하지만 회사가 커졌을 때 내가 CEO로서 기여할 바가 큰지는 모르겠다. 기술 외적인 부분이 중요해질 수 있다. CEO는 그런 일 잘하는 사람에게 넘기고, 나는 기술 창업자로서 R&D에 전념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빌 게이츠가 투자한 회사, 서남을 찾아오다

고온초전도 선재는 전력선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서남에 따르면 지난해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스(commonwealth fusion systems)’라는 미국 회사가 찾아왔다. ‘소형 핵융합로’를 개발하는 미래 에너지 업체다. 원자폭탄의 원리를 이용한 원자력발전과 달리, 수소폭탄의 원리를 활용해 전력을 생산하는 게 목표다. 이 회사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투자했다. 보다 정확히 말해 빌 게이츠와 아마존 창업주인 제프 베조스 등이 돈을 넣은 펀드(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가 커먼웰스에 투자했다.

커먼웰스가 서남을 찾아온 이유는 고온초전도 선재가 꼭 필요해서다. 소형 핵융합로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전자석을 만드는 데 초전도 전선이 쓰인다. 물론 핵융합로를 완성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다. 하지만 연구개발(R&D) 과정에도 전자석은 필수다. 커먼웰스가 고온초전도 선재 공급처를 찾아 나선 이유다.

서남의 이호엽 부사장(CFO)은 “커먼웰스 측은 현재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고온초전도 선재를 다 그러모아도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하더라”고 전했다. 이 부사장은 “올해 중 커먼웰스에 소량 납품이 가능할 듯하다”고 덧붙였다.

초전도 선재는 ‘한류기’라는 설비에도 쓰인다. 대형 변전소에서 과전류가 흐르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치다. 한 대에 고온초전도 선재 10㎞ 안팎이 들어간다. 서남은 이미 러시아와 태국에 한류기용 선재를 수출한 바 있다. 러시아는 모스크바 인근에 올해 한류기 4대를 추가 설치할 예정이다. 고온초전도 선재 시장은 그렇게 조금씩 열리고 있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