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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적폐 같은 차별과 투쟁의 언어가 괴물을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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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만의 인간혁명]언어와 사고

외계인 헵타포드(heptapod)는 먹물같은 액체를 뿌려 대화한다. 그들의 언어엔 시제 구분이 없고,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주인공도 외계어를 배운후 같은 능력을 갖게 된다. 언어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사진 영화 컨택트]

외계인 헵타포드(heptapod)는 먹물같은 액체를 뿌려 대화한다. 그들의 언어엔 시제 구분이 없고,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주인공도 외계어를 배운후 같은 능력을 갖게 된다. 언어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사진 영화 컨택트]

등장인물

조지 오웰

조지 오웰

조지 오웰
(1903~1950). 영국의 소설가·언론인. 전체주의를 풍자한 『동물농장』으로 명성을 얻었고 『1984』로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냉전 체제 아래 구소련을 비판하는 자유진영의 ‘페르소나’로 여겨졌지만 정작 본인은 사회주의자였다.

오웰 “언어가 사고와 행동 지배” #높임·낮춤말은 그 자체가 위계구조 #최장집 “조국은 치열한 투쟁 언어” #말의 오염이 영혼을 병들게 해

움베르트 에코

움베르트 에코

움베르트 에코
(1932~2016). 30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기호학자. 예술과 역사·철학을 넘나드는 그의 필력은 첫 소설인 『장미의 이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학문과 저작 활동을 통해 평생을 독선과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

벤자민 리 워프

벤자민 리 워프

벤자민 리 워프
(1897~1941). ‘언어가 생각을 결정한다’고 주장한 언어학자. 그의 이론은 스승의 이름을 함께 따 ‘사피어·워프 가설’로 불린다.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2000년대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통해 재조명 됐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 케인즈가 ‘신’이라고 표현했던 20세기의 천재. 철강 재벌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를 버리고 학문을 택했다. 언어를 철학의 범주에서 집대성했고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말로 유명하다.

칼 슈미트

칼 슈미트

칼 슈미트
(1888~1985). 쾰른대 법학교수였던 1933년 나치에 가입해 『국가, 운동, 민족』 등을 집필하며 전체주의의 이론적 틀을 다졌다. 히틀러의 3제국에서 ‘황제법학자’로 군림했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강조하고 국가를 하나의 통일체로 봤다.

문재인 정부의 실세인 586 정치인들은 왜 친일과 적폐란 표현을 많이 쓸까요. 반대로 과거의 보수 정권은 왜 빨갱이와 반공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을까요. 만일 조지 오웰이 살아 있다면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을 겁니다. 적폐와 반공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정치적 지향점을 나타내고, 그런 표현이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오웰이 쓴 『1984』는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은 사방이 ‘텔레스크린’으로 둘러싸여 있고 모든 일상이 녹화됩니다. 조그만 목소리의 대화도 국가에 감시당하죠. 미셸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발달된 정보기술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체계)’의 전형입니다.

1949년 집필 당시 오웰이 그린 미래사회는 전 세계가 오세아니아·유라시아·동아시아의 세 나라로 통일돼 있습니다. 모두 독재 권력이 주민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주인공이 사는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곳으로 ‘새말(newspeak)’이라는 신어(新語)를 씁니다. 언어를 통해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 통제하는 감시사회의 결정판이죠.

새말에는 먼저 체제를 비판하거나 대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free’라는 말은 있지만 ‘설탕이 없다(sugar free)’는 식으로 사용될 뿐, ‘자유의지(free will)’나 ‘사회적 자유(social freedom)’ 같은 표현은 없습니다. 오웰은 책의 해제(解題)에서 “개인이 어떤 생각을 갖더라도 이를 표현할 단어가 없으니 나중에는 새로운 생각 자체를 못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가 그랬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선전·선동에 능하도록 짧고 간결하며 직관적이었습니다. 유년시절을 무솔리니 치하에서 보낸 움베르트 에코는 “파시즘은 복잡하고 비판적인 추론의 도구를 제한하기 위해 빈약한 어휘와 초보적인 문법을 사용했다”고 지적합니다. (『원형의 파시즘』)

이처럼 말은 사고의 틀과 내용을 규정합니다.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는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드러내는 복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생각을 형상화하고 실재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원래 사소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붙이고 난 후에야 비로소 ‘꽃’(김춘수)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내가 쓰는 언어가 곧 세상의 한계”

워프는 ‘눈(snow)’이라는 표현을 예로 듭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선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하나지만 이누이트에겐 ‘하늘에서 내리는 눈’, ‘바람에 휩쓸리는 눈’, ‘녹기 시작한 눈’, ‘땅 위에 쌓인 눈’, ‘눈사람처럼 뭉친 눈’ 등 각기 다른 눈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표현만큼 더욱 세밀하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언어, 사고, 그리고 실재』)

언어는 사물의 다양한 심상(心象)을 만들어 사물에 특징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다리(bridge) 사진을 독일과 프랑스 사람에게 보여주고 처음 떠오르는 느낌을 답하라고 하면 어떨까요. 6개 국어에 능통해 ‘언어천재’로 불리는 조승연 작가는 우리의 편견과 달리 독일인은 아름답다·우아하다 등의 반응을, 프랑스인은 견고하다·튼튼하다 같은 표현을 떠올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독일어의 ‘다리(brucke)’는 여성명사이고, 프랑스어의 ‘다리(pont)’는 남성명사이기 때문이죠.

어순도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어에선 ‘나는 너를 사랑해(주어+목적어+동사)’라고 하지만 영어는 ‘I love you(주어+동사+목적어)’입니다. 너(you)와의 관계가 먼저냐, 사랑(love)이라는 감정이 우선이냐는 거죠. 영어권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감정을 나타내는데 익숙한 이유도 이런 영향이 큽니다. 또 한국어의 높임·낮춤말 문화는 누가 그 말을 쓰느냐에 따라 위계서열이 나뉘죠.

논리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과 명제 역시 언어로 정의돼 있지 않으면 합리적인 추론과 연역적 사고를 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머릿속의 상념들을 그림과 조각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 객관성을 띠기 어렵죠. 반면 언어는 공통의 기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상합니다. 언어가 있어야 개념을 정의할 수 있고, 개념이 밑바탕 돼야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죠.

즉, 인간이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 때문입니다. 20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언어 분석에 집중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고,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쓰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영화 ‘컨택트’(2016)는 지구에 온 외계인의 메시지를 인류가 해석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미국에선 언어학자 루이스가 외계어와 영어의 유사성을 분석해 대화를 시도하고, 중국은 마작을 이용해 소통합니다. 그런데 루이스는 중국의 방식이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마작과 체스처럼 승패의 룰이 뚜렷한 도구로 소통하면 적대적인 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언어는 모든 문명의 초석이지만 모든 싸움의 첫 번째 무기”라는 루이스의 설명처럼 적대적 언어는 갈등을 초래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언어는 투쟁·갈등 유발

무솔리니(左), 히틀러(右)

무솔리니(左), 히틀러(右)

100년 전 공격성과 차별을 내포했던 히틀러의 언어는 폭력을 유발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1930년대 독일에선 (나치) 패거리의 언어가 국민의 언어가 됐다”며 “극우들의 은어, 자기편을 과시하는 표현, 인종차별·여성혐오적 언어가 완전히 주류가 돼 일반정치와 사회담론으로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진실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이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586 정치인들이 민주화 운동 시절 독재 타도를 위해 사용했던 언어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반공·빨갱이를 강조하는 극우세력의 언어와 비슷합니다. ‘투쟁’, ‘강철대오’ 같은 단어는 세상을 둘로 나누고 상대를 대화와 합의의 대상보다는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보기 쉽죠. 그 과정에서 ‘우리’만의 진영 논리는 더욱 강화됩니다.

지난해 반일·적폐 논쟁을 주도했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진보 정치학의 대부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나치즘을 연상시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최 교수는 조 전 장관이 쓴 『진보집권플랜』에 대해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수구처럼 확실한 구분과 치열한 투쟁을 지향하는 경향은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과 깊이 접맥된다”고 평했습니다. 슈미트는 나치에서 ‘황제법학자’로 불리며 전체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성숙한 시민들이 ‘깜둥이(Negro)’와 같은 차별적 표현을 쓰지 않고 장애인의 반대말을 일반인이 아닌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말이 사고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화합의 언어를 써야만 우리의 생각도 순화됩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죠. 뉴스 기사와 SNS에 난무하는 각종 비방과 혐오·욕설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성격과 태도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죠. 영혼의 병듦이 말의 오염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막말과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들, 혐오와 비난에 익숙한 사람들이 “새로운 프레임에는 새로운 언어가 있어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지 레이코프의 말을 되새봐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