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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석 달간 무제한 돈 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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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주열. [뉴시스]

이주열. [뉴시스]

한국은행이 앞으로 3개월간 은행·증권 등 금융회사에 사실상 무제한으로 돈을 풀기로 했다. 금융회사가 국·공채를 담보로 맡기면 한은이 저금리로 현금을 빌려주는 방식이다. ‘한국판 양적완화’의 시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실물경제가 급속히 얼어붙는 상황에서 경제의 혈관(금융)이 막히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금융회사 RP 매입해 현금 수혈 #기업·민생에 자금 지원 쉬워져 #한은 “70조 유동성 공급 효과” #코로나발 경기 악화 강력 처방전 #금융사가 원하는 대로 RP 사줘 #“금융위기 학습효과로 빠른 대응” #7월 이후엔 상황 봐서 연장 결정

한은은 26일 오전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공개시장 운영 규정과 금융기관 대출 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다음달 2일부터 6월 말까지 매주 한 차례씩 한은이 환매조건부채권(RP)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금융회사에 3개월짜리 단기 자금을 공급한다. 한은은 액수를 제한하지 않고 금융회사가 원하는 만큼 돈을 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 기준금리(연 0.75%)에 0.1%포인트를 더한 연 0.85%를 RP 금리의 상한선으로 설정했다. 은행·증권사 입장에선 오는 6월 말까지는 언제든지 원하는 액수만큼 연 0.75~0.85%의 금리로 한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한은은 오는 7월 이후에도 이번 조치를 연장할지는 시장 상황을 고려해 결정하기로 했다.

RP 거래는 한은이 시중에 돈을 풀거나, 풀린 돈을 거둬들일 때(공개시장 운영) 쓰는 수단이다. 한은이 금융회사에서 RP를 사들이면 그만큼 현금이 시중에 풀린다. 반면 한은이 금융회사에 RP를 팔면 시중 자금을 거둬들이는 효과가 있다.

이날 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윤면식 한은 부총재는 무제한 RP 매입을 양적완화의 일환으로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한은, 외환위기 때도 안 쓴 ‘한국판 양적완화’ 카드 꺼냈다

윤 부총재는 “다만 선진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는 정책금리를 제로(0)로 낮춘 다음 더 이상 (금리 인하의) 여력이 없을 때 돈을 공급하는 방식”이라며 “한은의 이번 조치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현재 한은 기준금리는 제로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의 양적완화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윤 부총재는 이번 조치로 시중에 약 70조원의 유동성이 공급될 것으로 전망했다.

‘코로나19’ 확산 후 한국은행 주요 금융 정책.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코로나19’ 확산 후 한국은행 주요 금융 정책.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한은의 무제한 RP 매입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았던 파격적인 카드다. 그만큼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악화를 한은이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이종우 이코노미스트(전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는 “2008년 금융위기 때 학습효과로 신용 경색만은 막아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가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은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은은 RP의 담보가 되는 채권 종류를 크게 늘렸다. 은행·증권사가 한은에서 돈을 빌리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은행·증권사는 한국전력·도로공사·철도공사 등 8개 공기업 발행 채권도 한은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RP 거래에 참여할 수 있는 증권사의 숫자는 기존의 4개에서 15개사로 확대했다.

한은이 무제한 자금 공급에 나선다는 소식에 채권 금리는 일제히 하락(채권값은 상승)했다. 시장금리의 지표가 되는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064%포인트 내린 연 1.067%에 장을 마쳤다. 국고채 1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018%포인트 낮은 연 0.995%로 마감했다. 국고채 1년물 금리가 0%대로 낮아진 것은 지난 18일 이후 6거래일 만이다.

한은의 이번 조치로 정부가 발표한 100조원 규모의 민생·금융안정 패키지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100조원 중 상당 부분은 금융회사의 참여로 이뤄진다. 금융회사로선 한은의 측면 지원을 받게 된 셈이다. 윤 부총재는 “이번 조치가 정부의 민생·금융 안정 패키지에 필요한 유동성을 원활히 공급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 한은이 추가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도 커졌다. 윤 부총재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에 대해 “(2008년) 금융위기와 비교해 그 영향이 크다”며 “최상의 경계감을 갖고 현재 시장 상황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동원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금융시장에선 상황이 더 악화하면 한은이 기업에 직접 자금을 공급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한은이 직접 사들이는 방식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정부가 출자하는 특수목적 법인에 자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회사채·CP를 사들인다. 만일 손실이 생기면 정부 출자금에서 우선적으로 손실을 떠안는 구조다.

현재 한은법에 따르면 한은이 회사채나 CP를 직접 살 수는 없다. 대신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면 가능하다. 윤 부총재는 “정부의 지급 보증은 국회를 통과해야 가능하다. 국민 공감대를 형성할지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결단하면 한은이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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