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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초콜릿향에 넛트 풍미까지…하늘을 날게 해준 이 맥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39)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브뤼헤로 향한다. 도시에 들어서자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다. 브뤼헤는 헨트 시내와 비슷하면서도 더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인 느낌이다. 운하를 중심으로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늘어서 있다. 성당은 섬세한 외관, 장엄한 내부 모습으로 탄성을 자아낸다. 종루에 올라가면 브뤼헤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걸어서 반나절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아담한 크기다. 마르크트 광장의 한 식당 야외 좌석에 앉아 벨기에 와플을 썰어본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예상했던 그 맛이다.

벨기에에 왔다면 꼭 경험해야 할 맥주 중 하나가 수도원에서 만든 트라피스트 맥주(Trappist Beer)다. 트라피스트는 가톨릭 수도회 중 하나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만든 맥주 중 품질 인증을 받은 것이다.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로부터 인정받은 수도원 양조장만이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명칭을 쓸 수 있다. 트라피스트 인증을 받은 맥주 양조장 중 6개가 벨기에에 있다.

방문한 곳은 트라피스트 맥주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으로 유명한 성식스투스 수도원(Sint-Sixtus Abbey)이다. 널찍한 야외 펍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맥주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경건한 수도원의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성식스투스 수도원의 베스트블레테렌 맥주. [사진 황지혜]

성식스투스 수도원의 베스트블레테렌 맥주. [사진 황지혜]

이곳에는 세 종류의 맥주가 있다. 먼저 알코올도수 5.8%의 밝은색 맥주 ‘블론드’와 8%의 ‘베스트블레테렌8’을 주문한다. 감귤류의 향이 팡팡 터지면서 몰트의 단맛과 드라이한 끝 맛이 매력인 블론드를 마시니 기분이 고조된다. 짙은 갈색의 베스트블레테렌8은 은은한 과일향에 곡물의 풍미가 강조된 맥주다.

드디어 성식스투스 수도원 맥주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베스트블레테렌12’를 접한다. 트라피스트 맥주 중 가장 도수가 높은 쿼드루펠로 분류되는 베스트블레테렌12는 ‘세계 최고 맥주’라는 별칭으로도 불릴 만큼 맛이 독보적이다. 전 세계 수많은 맥주를 평가하는 맥주 평가사이트에서 오랜 기간 1위를 지켰다. 건포도와 캐러멜, 초콜릿의 달콤한 향과 견과류의 풍미를 내뿜는 가운데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허브 같은 느낌과 쌉쌀함으로 마무리된다. 알코올 도수 10.2%에 걸맞은 묵직한 느낌도 마음을 꽉 채운다. 이제는 수입이 돼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지만, 수도원 양조장의 너른 야외 펍에서 생맥주로 즐기는 맛은 어디에 비해야 할지 모를 만큼 감동적이다. 도수 높은 맥주를 여러 잔 마신 탓인지, 베스트블레테렌12 맥주와 잔을 세트로 구입해서 그런 건지, 하늘을 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구름 속을 날아 숙소에 들어온다.

머물고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의 주인 할머니는 매일 아침 야외 테이블에 한 상을 깔아주신다. 갓 구운 신선한 빵과 팬케이크, 치즈, 버터, 계란과 과일까지 완비된 아침상이다. 정성이 가득한 아침 식사지만 북엇국 한입이 간절하다.

숙소에서 제공되는 아침식사.

숙소에서 제공되는 아침식사.

숙소 전경.

숙소 전경.

각각 네덜란드어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우리의 영어 대화는 어색한 웃음으로 끝을 맺곤 한다. 그녀는 이런 액티브한 여행자는 처음이라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운다. 매일 아침을 후다닥 먹고 동서남북으로 맥주를 찾아다니다가 늦은 밤에야 숙소에 기어들어 오니 그럴 만도 하다. 숙소 앞 수영장이나 정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마시기만 하기에도 부족한 일정이다.

오늘은 북쪽으로 이동해보기로 한다. 벨기에 남부와 북부의 분위기는 상이하다. 사용하는 언어와 사람들의 생김새까지 다를 정도다. 벨기에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인데 남부는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북부는 네덜란드어를 쓴다. 이렇다 보니 한 곳의 지명이 여러 가지로 불린다. 내가 묵고 있는 곳은 네덜란드어로 헨트, 독일어로 겐트, 프랑스어로 강이라고 한다.

오늘 찾은 북부 도시 안트베르펜은 앤트워프, 앙베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로부터 무역으로 번성한 안트베르펜은 다이아몬드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유명 패션 스쿨도 있어서 그런지 화려한 느낌이다. 맥주 애호가에게 안트베르펜은 또 다른 의미에서 화려한 지역이다. 지하 창고에 보물 같은 맥주들을 수십 년에 걸쳐 보관하고 있는 펍 쿨미네이터(Kulminator)가 있기 때문이다.

쿨미네이터 외관.

쿨미네이터 외관.

옛날 가정집을 그대로 보존한 것 같은 분위기에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어지럽게 쌓여있는 맥주병들에 정신이 홀릴 것만 같다. 여주인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메뉴판을 건넨다. 보험 계약할 때 주는 약관설명서 같이 생긴 메뉴판이 보험 약관보다 2배는 두껍다. 여기서는 다른 데서 할 수 없는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양조된 맥주를 비교 시음해보는 것. 2008년산, 2013년산, 2018년산 시메이 블루를 주문한다. 시메이는 트라피스트 맥주 중 하나로, 시메이 블루는 시메이 맥주 중 가장 도수가 높은 검은 맥주(쿼드루펠)다. 위스키만 시간이 갈수록 숙성되는 것은 아니다. 쿼드루펠처럼 도수 높고 풍미가 짙은 맥주는 묵힐수록 더 찐득하고 묵직해지면서 다양한 맛을 펼친다. 가장 오래 묵힌 2008년산 시메이 블루가 압도적이다. 절제된 건과일, 견과류의 풍미가 세련된 노신사처럼 다가온다. 묵직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다가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마무리된다.

여행 와서 술만 퍼마시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으로 이름이 높은 안트베르펜 중앙역에 가서 기념 촬영을 한다. 또 플란더스의 개 동상을 구경하고, 요정이 나올 것만 같은 초콜릿 가게에서 수제 초콜릿도 사 먹는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문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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