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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받으러간 ‘매출 0’ 사장···눈앞엔 접수도 못한 서류 수백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20년 넘게 여행사를 하면서 사스·신종플루·메르스 다 겪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신용보증재단 대출심사 몰려 병목 #돈 나올 때까지 최대 4개월 걸려 #“실무자 면책 넓혀 심사 속도내야”

20일 오후 기업은행 동대문지점에서 만난 조영호(56) 씨는 이번 코로나19가 겪어본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은행 창구에서 ‘초저금리 특별대출’을 5000만원 신청하고 돌아섰다. 금리가 1%대인(보증료 별도) 일명 ‘코로나 대출’ 상품 중 하나다.

20일 기업은행 동대문지점의 기업영업 담당 창구를 찾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 정용환 기자

20일 기업은행 동대문지점의 기업영업 담당 창구를 찾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 정용환 기자

조씨는 “설 연휴 이후 여행상품 판매가 완전히 끊기고 판매했던 것도 모두 환불요청이 들어왔다”며 “2월 중순부터 매출이 ‘제로’여서 지금 그야 말로 ‘멘붕’ 상태”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 전 2명이었던 직원도 월급을 감당할 수 없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모르는 이 상황을 버텨내려면 대출 지원이 긴급히 필요하다.

조씨처럼 대출을 받으려는 소상공인 수요가 급증세다. 코로나 보릿고개를 넘길 길은 현재로선 금융권 대출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 내기 어려운 대출심사 절차가 현장에선 발목을 잡는다.

기업은행 동대문지점엔 하루에 15~20명 고객이 코로나 대출을 신청하러 찾는다. 지난달 초 5명 내외에서 크게 늘었다. 하지만 지점 금고엔 아직 접수되지 못한 코로나 대출 신청서류가 수백장 쌓여있었다. 대출 보증심사를 맡은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병목현상이 나타나서다. 이 지점 관계자는 “대출 보증을 받기 위해 고객 서류를 들고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서울신용보증재단으로 올라가도, 재단엔 항상 1000건 넘는 신청서가 쌓여있어 일처리가 빨리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인터넷포털의 소상공인 카페엔 코로나대출을 신청해도 나오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는 하소연이 이어진다. 현재 코로나대출 심사는 지역 신용보증재단이 맡는데, 지역에 따라 대출신청 뒤 대출이 나오기까지 한달부터 최대 4개월까지 걸릴 수 있다고 안내를 하고 있어서다.

기업은행 동대문지점 금고에 쌓여있는 '코로나 대출' 관련 서류들. 정용환 기자

기업은행 동대문지점 금고에 쌓여있는 '코로나 대출' 관련 서류들. 정용환 기자

그렇게 기다려도 대출이 기대한 만큼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신청자의 신용등급, 담보내역, 대출 보유 여부, 업종, 매출 등에 따라 대출금액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20일 서울의 다른 은행 지점에서 만난 기업대출 담당자는 “대부분 고객이 코로나대출 한도를 꽉 채워 신청하지만 그렇게 다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그래서 신용대출 상품 등도 추가로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소상공인 인터넷카페엔 “신용등급이 높은데도 업종이 음식점이라 코로나대출을 2000만원 밖에 못 받았다”, “대출한도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불만 글이 이어졌다.

정부도 이런 현장의 목소리를 모르진 않는다. 특히 너무 오래 걸리는 대출심사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19일부터 지역 신보의 보증심사 업무 일부를 은행에 넘기도록 위탁계약을 맺게 했다. 심사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지역신보를 거치지 않는 대출금리 1.5%짜리 시중은행 상품도 다음달 초 출시한다. 정부 재정을 은행에 지원해 금리를 낮추는 방식이다. 영세 소상공인(연매출 1억원 이하)을 대상으로는 3조원 상당의 신속·전액보증 지원 프로그램을 별도로 가동한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최소한의 체크리스트 위주의 간이 심사를 통해 신속한 보증 실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대출 실무자에게 적용하는 면책 규정을 손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출 심사 간소화가 핵심인데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라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비상 시국인만큼 별도의 가이드라인을 줘야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긴급 대출 자금에 더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주영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정부가 헬리콥터처럼 돈을 뿌린다’고 했지만 소상공인·중소기업을 위한 긴급 대출자금은 금세 소진됐었다”며 “지금은 그때보다도 사태가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안효성·정용환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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