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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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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영국의 한 간호사가 며칠 전 페이스북에 올린 동영상을 봤다. 그는 퇴근길에 들른 슈퍼마켓의 텅 빈 진열대를 보여주며 “중환자실에서 40시간 교대근무를 마치고 슈퍼마켓에 갔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집에서 쉬는 동안 먹을 게 필요하니 제발 사재기를 멈춰 달라”는 호소였다. 코로나 19 팬데믹 속에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사재기 광풍의 한 단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만큼 #인간을 비루하게 만드는 것 없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파장, 후유증 줄이는 게 급선무

지난주 미국의 대형 마트에서 화장실용 휴지 꾸러미를 놓고 흑인 여성 한 명과 백인 여성 두 명이 서로 머리채를 끌어당기며 싸우는 모습이 고스란히 유튜브 동영상에 담겼다. 대형 카트를 밀고 마트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닥치는 대로 물건을 쓸어담는 장면이 전 세계에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없이 뭔가를 사는 걸 보면 왠지 나도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왜 휴지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가짜 뉴스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불안감이 군중심리와 만나면 이성은 설 자리를 잃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만큼 인간을 비루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전 세계 35개국에서 약 10억 명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코로나 19에 대한 방역 및 공공의료 체계가 붕괴 직전인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스페인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 일부 지역에서 이동금지령이 발효 중이다. 식료품 구매와 병원·약국 방문, 불가피한 출근 등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외출하려면 사유를 기재한 진술서를 단속하는 경찰관이나 군인에게 보여줘야 한다. 사실상의 통행금지다.

힘든 시기를 견디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탈리아인들은 오후 6시면 베란다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 무료함을 달래고, 연대감을 확인하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지난 주말 뉴욕타임스는 고립의 시기에 읽기 좋은 책 리스트를 제시했다. 어차피 견뎌야 할 시간이라면 독서를 하며 유익하게 보내라는 권고다.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에 따르면 개학 연기가 발표된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15일까지 3주 동안 청소년용 도서 판매량이 전년 동기보다 96% 늘었다고 한다.

그동안 인간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해온 전염병의 공포에서 거의 벗어났다고 믿었다. 전염병 앞에서 속수무책이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신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흑사병의 시대와 달리 전염병은 더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즉 인재(人災)로 봐야 한다고 자만했다. 기아와 전염병,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인간은 마침내 불멸과 신성(神性)을 꿈꾸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코로나 19는 그러한 믿음이 인간의 오만임을 보여주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AI)에서 사스, 에볼라에서 메르스까지 감염병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인간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고 했지만, 그저 말뿐이었음을 코로나 19 팬데믹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방역과 공공의료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강화하지 않으면 세계화, 도시화, 온난화 시대를 맞아 신종 전염병의 저주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19는 한두 달 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올여름, 길게는 올 연말까지 지속될 싸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세계 인구의 70% 이상이 감염돼 집단면역이 생기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암울한 전망도 있다. 언젠가는 종식되겠지만, 그 사회적 파장과 경제적 후유증이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게 문제다. 특히 그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비대칭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근로자들은 당장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경기 침체의 여파는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비정규직을 시작으로 경제 활동 참가자 전체로 빠르게 확산할 것이다.

중국이 코로나 19 진압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한국이 대대적이고 공격적인 검진으로 방역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지만, 결과는 아직 두고 봐야 한다. 지구촌 전체가 코로나 19에서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나마 한국이 이 정도로 버티는 것은 국민의 높은 의식 수준에 힘입은 바 크다. 사재기를 하지 않고, 긴 줄을 서가며 마스크를 사서 착용하고, 개인위생 수칙을 잘 지키고, 사회적 거리 두기에 적극 동참하는 우리 국민 때문이다. 힘들 때 더 힘든 이웃을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국민에게 지금 정치권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총선을 앞두고 한 석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여야 가리지 않고 꼼수에 꼼수를 거듭하고 있다. 정부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자화자찬으로 국민의 속을 긁을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 보호와 무너져 내리는 경제와 민생 살리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실효적이고 신속한 지원책이 나오지 않으면 코로나 19로 바닥 경제부터 무너질 판이다. 지금은 누가 잘하고 못하고 따질 때가 아니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