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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소확행’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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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어느 날 미국의 트럼프가 중국의 군사기지로 핵미사일 버튼을 누른다. 은행이 줄도산하면서 안정적인 듯 보였던 한 가족의 삶은 곤두박질친다. 자산관리 전문가였던 남편은 알바를 뛰느라 숨 돌릴 틈이 없다. 회계사인 아내는 인공지능에, 학교 조리사인 동생은 즉석식품에 일자리를 빼앗긴다. 혼란 속에 권력을 잡은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시시각각 가족의 숨통을 조여 온다.

남의 불행 위에 가능했던 행복 #디스토피아는 이미 시작됐다 #“광대와 괴물” 오기 전에 바꿔야

2019~2034년의 영국을 그린 드라마 ‘이어즈&이어즈’는 정치를 외면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보여준다. 그 섬찟함으로 현재에 감사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하다. 디스토피아와의 시간적 거리가 그만큼 좁고, 오늘 누리는 일상이 1㎝도 안 되는 널빤지 위에 놓여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공포는 현실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코로나19’ 안내 문자는 재난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다. ‘전쟁’이란 단어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번 사태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당신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소확행(小確幸·작고 확실한 행복)’은 없다.

코로나19와 그에 따른 실물경제 위기는 예고편일 뿐이다. 당신의 삶을 전복시킬 불안정성은 정치와 경제, 환경, 그 어느 쪽에서도 올 수 있다. “IQ 70 이상에게만 투표권을 주자.” 요즘 같은 정치적 대치가 계속된다면 드라마 속 황당한 공약이 현실에 등장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곁엔 이미 디스토피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구로구 콜센터의 한 상담원은 아침에 출근하기 전, 새벽 일찍 여의도 증권가에 녹즙을 배달했다. 또 다른 상담원은 주 5일 근무 후 주말 이틀을 꼬박 8, 9시간씩 편의점 알바를 했다. 한 20대 청년은 오전 11시부터 수퍼마켓에서 배송 업무를 한 뒤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음식점에서 일했다. 이 모든 게 확진자 동선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소확행을 지탱한 건 지금은 ‘○○ 번째 확진자’가 된 이들이 목숨 걸고 전해 준 녹즙과 보험 상담, 식료품, 밥 한 끼였다. 그뿐인가. 당신과 내가 언젠가 가게 될 요양병원이 눈앞에 잘 보이지 않았기에 한때라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의 소확행은 ‘크고 확실한 불행’들이 잘게 파편화돼 가능했다.

고통은 약한 부위를 찾아 무섭게 파고든다. 지난 2월 일시 휴직자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14만2000명 증가해 10년 만에 최대 폭을 기록했다(통계청 ‘2월 고용동향’). 도·소매, 음식·숙박업 등 자영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달 통계부터 본격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세상이야 어찌 되든 우린 ‘해피 뉴 이어’ 할 거라고? 작가 박완서는 말한다.

“저는 중산층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저 계층이라고 봐요.”

『박완서의 말』(마음산책)은 모래성을 연상시킨다. 가장자리에 있는 모래가 쓸려 가면 안쪽 모래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의 논리는 유효하지 않다. ‘이어즈&이어즈’ 가족의 현명한 할머니는 “모든 게 앉아서 불평만 했던 너희들 잘못”이라고 한다.

“시작은 수퍼마켓이었어. 계산대 여자들을 자동계산대로 바꿨지. 사실은 싫었다고? 그러면서 반대 시위도, 서명도 안 했잖아. 참고 있었지. 우리가 없앴고 쫓아낸 거야. 우리가 만든 세상이라고.”

그간 ‘성장의 파이’를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맛있게 나누느냐만 고민해 왔다.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불행의 파이’를 어떻게 바꾸느냐다. 지금처럼 고통을 아래로, 아래로 전가한다면 모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단언하건대 남의 불행 위에 쌓아 올린 소확행은 신기루일 뿐이다.

“온갖 광대와 괴물이 웃고 뒹굴며 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수퍼마켓 계산대’가 바뀌기 전에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재난기본소득에 그칠 일도, 정치인들만 믿고 맡길 일도 아니다. 세상을 만드는 건 바로 우리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