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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동현의 이코노믹스

퍼펙트 스톰에서 믿을 건 달러화밖에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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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전자산까지 삼킨 코로나 사태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연일 주가가 폭락하면서 12년 만에 핵폭탄급 금융위기가 재림했다. 코로나19 사태의 후폭풍이다. 이번 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현상이 있다. 바로 안전자산의 실종이다. 대표적 안전자산으로는 달러화·엔화·금, 그리고 미국 국채를 들 수 있다. 금융시장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들 자산은 ‘투자자금의 도피처(flight to quality)’로 활용됐다. 지난 3일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첫 번째 ‘빅컷’을 단행한 후 9일까지만 해도 이런 공식이 대충 들어맞았다. 금 가격은 오르고 엔화 가치 역시 상승했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 역시 1%에서 0.57%까지 하락해 가격이 대폭 상승했다. 다만 주요통화 대비 달러 가치 지표인 달러인덱스는 금리 인하 여파로 오히려 하락했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금융위기 때 상황과 비슷했다.

위기의 본질은 매출 실종, 현금 부족 #전대미문 상황에 금·엔화도 힘 못 써 #미국, 달러 수요 막으려 스와프 제공 #기업에 유동성 공급해 버티게 해야

현지시각으로 10일부터 이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 주가는 계속해서 폭락을 거듭하는 가운데 달러 가치는 상승하고 나머지 안전자산들, 금·엔화·미 국채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사불란한 반전이었다.

도대체 이틀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9일 S&P500이 7.6% 하락하면서 고점 대비로는 낙폭이 19%에 달했다. 이에 따라 일부 기관투자자의 손실 한도에 따른 매물이 시장에 출현한 뒤 변동성이 극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최대 예상손실액 (VaR)을 초과한 기관투자자가 위험 자산을 무차별적으로 10일부터 처분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10년물에 비해 30년물 금리가 더 많이 오른 것이 이를 반증한다. 헤지펀드 역시 투자자의 회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다 보니 주식 같은 위험자산뿐 아니라 안전자산까지 처분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진콜(증거금 보충)을 당한 기관이 담보로 제공했던 국채는 강제 매도됐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의심이 가는 부분은 미국에서 확진자 급증이다.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선 날짜가 10일이다. 공식적으로는 코로나19에 대한 실시간 상황판을 제공하는 존스홉킨스대가 11일 오전 10시 미국의 확진자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고 했지만, 월가에서는 이미 그 전날 이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일종의 ‘큰 숫자 효과(big figure effect)’로 인해 코로나19가 향후 미 산업계에 퍼질 영향에 대해 본격적인 경각심이 반영됐을 것으로 보인다.

산업 셧다운이 달러 수요 촉발

안동현의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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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가장 큰 문제는 산업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 산업이 부분적으로나 전면적으로 셧다운 된다. 직격탄을 맞은 항공·관광·공연·호텔·레스토랑 및 서비스 산업뿐 아니라 일반 제조업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경 봉쇄로 수출입 산업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모든 산업을 망라해 매출 감소는 불가피하다. 매출이 대폭 줄게 되니 현금 유입 역시 줄어들지만, 임금이나 임대료와 같은 고정비는 계속 지출해야 하고 외상 매입금이나 미지급금과 같은 단기 부채 상환도 대응해야 한다.

결국 미국 기업 입장에서는 바이러스 문제가 종식돼 정상화될 때까지 보유 현금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보유 현금이 바닥나고 단기 차입에 실패하면 파산을 면할 수 없다. 한 기업의 파산은 매출채권을 보유한 다른 기업의 파산을 불러오고 이러한 연쇄파산은 금융기관의 대출을 제한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그야말로 ‘퍼펙트 스톰’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일반기업이나 금융기관이나 모두 현금, 즉 달러를 최대한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 입장에선 코로나19와 생존을 위한 시간 싸움을 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 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의 달러 확보 비상으로 달러값이 폭등하면서 달러 차입을 한 외국 기업도 덩달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렇다 보니 전 세계가 달러 확보에 혈안이 되면서 달러 가치는 더 급등했다. 달러 수요 급증은 달러를 결제통화로 쓰고 있는 미국 기업 입장에서는 보유한 시장성 유가증권이나 국채, 외환을 팔아서라도 달러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 지난 19일 한국과 미국이 달러 통화스와프를 한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이는 미국이 다급해서 주도한 통화스와프다. 달러 가치를 하락시켜 어떻게든 달러 확보 현상을 진정시켜야 미국 기업들의 생존 기간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자산의 실종은 이번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매출의 실종과 이로 인한 기업 현금의 실종,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미 연준은 이에 대응해 제로금리와 함께 7000억 달러 규모의 양적완화를 발표한 후 이를 신속하게 집행하고 있다.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규제로 이렇게 풀린 유동성이 기업으로 흘러가는 데 애로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 도입된 금융규제는 크게 자본규제와 유동성 규제, 여기에 볼커룰과 ‘규정(Regulation) W’ 등 은행의 건전성을 강화하는 규제들이다.

기업들 심장 박동 소리 희미해져

금융규제는 ‘평시에는 조이고 위기에는 푸는’ 경기 순행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위기에 대비해 버퍼를 쌓고 위기가 닥치면 버퍼를 이용해 탄력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해줘야 한다. 그런데 새로 도입한 규제가 평시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되다 보니 한편으론 연준이 유동성이란 실탄을 은행에 지급하고 동시에 ‘사격금지’ 명령을 내린 격이 되었다. 최근 미국의 대형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fA)가 신용경색 문제를 풀기 위해 한시적인 금융규제 완화를 제기했고 미 연준 역시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실종된 안전자산은 다시 회귀할 가능성이 높지만 달러 수요는 본질적인 문제라 그리 쉽게 진정되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결론적으로 이번 위기의 본질은 산업의 셧다운으로 인한 기업의 유동성 위험이다. 우리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가계뿐 아니라 ‘기업 구출’에도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에 대한 청구권 순서대로 유동성을 투입할 필요성이 있다. 단기 자금시장부터 유동성 공급을 해야 하며, 그다음이 회사채 및 대출 시장이고 마지막으로 주식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 해법의 키는 기획재정부보다는 한국은행이 쥐고 있다. 한은은 일단 단기 자금시장에 유동성을 투입해 정상화하고 금융채뿐 아니라 회사채로 채권매입 범위를 확대하는 ‘질적 완화’까지 고려해 어떻게 하든 신용경색을 방어해야 한다. 지금 기업들의 심장 박동 소리가 희미해지고 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유동성 투입의 병목이 된 미 금융규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새로 도입된 자본규제는 유동성 투입의 병목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8개 글로벌 대형은행(G-SIFI)의 경우 추가자본 적립의무 (surcharge)가 있는데 그 비율은 대출과 같은 위험자산에 비례해 높아지게 돼 있다.

이 규제의 문제점은 이미 지난해 말 JP모건이 환매조건부채권(RP) 시장에서 자금을 빼면서 RP 금리가 2%에서 10%로 폭등한 사건에서 예견되었다. 이렇게 급하게 RP 시장을 통해 대출 규모를 줄인 이유는 상대적으로 대출이 많은 JP모건의 경우 자본금 추가적립 비율이 4%에 육박해 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과 같이 보유 자산가격이 폭락하고 부실채권(NPL)이 급증하면 8대 대형은행의 자본금 추가적립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에 일단 대출과 같은 위험자산 규모를 줄여야 한다.

새로 도입한 유동성 비율(LCR) 규제 역시 단기자금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외 볼커룰과 규정 W와 같은 규제가 채권시장의 유동성을 감소시키고 위험자산 수요에 공백을 초래해 은행에 유동성을 투입해도 효과가 제한되는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미 당국이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