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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나 혼자 잘 먹고 잘산다고 웰다잉 가능할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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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동네 슈퍼마켓에 다녀왔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 자주 다니던 큰 슈퍼는 피하고, 집 가까운 곳에서 장을 본다. 카트를 밀 때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신경이 쓰였다. 비닐장갑을 낄까 했지만, 유난을 떠는 거 아닌가 싶어 그냥 왔더니 장 보는 내내 맘이 불편했다. 계산대 앞에 놓인 손 세정제를 보자마자 바로 손을 문질렀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무섭니?”, “환자와 온종일 씨름하는 의료진도 있는데”라는 반문이 저절로 나왔다. 참, 나는 대구에 산다.

사회적 재난조차 불평등하게 배분 #너무 과하지 않는 ‘이별’ 준비 필요

감염되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치료된다는 다짐을 자꾸 해봐도 불안감은 가시질 않는다. 서울에 가야 하는 일정도 몇 가지를 취소했다. 오늘 아침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부했고, 웰다잉(Well-Dying) 시민운동 창립 멤버로도 참여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웰다잉에 대한 내 생각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졌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는 웰다잉이 나 하나만 잘 먹고 잘살다가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한 번 더 일깨워주고 있다. 혼자 면역력을 키우고, 내 입에 마스크 단단히 씌운다고 바이러스나 재난이 나를 피해가지 않는 것이다. 방역체계, 의료 시스템, 그리고 남과 이웃을 배려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시민적 윤리 등이 조화롭게 배열되고 서로 부응해야 한 개인의 건강과 죽음 맞이도 가능할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또 하나는 전염병과 같은 사회적 재난도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게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고령의 정신질환자들이 살고 있던 대남병원, 수천 명의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들이 일하는 서울 구로 콜센터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났다. 이들 현장은 바이러스 무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기복제의 장소였다. 그곳은 국가를 비롯해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체 해왔고, 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이’ 매일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 생존의 공간이었다. 사회적 관심과 배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전염병은 증식하고 죽음은 불평등하게 찾아드는 것 아닐까.

그리고 코로나19는 준비를 잘하는 것과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작업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방역과 의료 체계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준비돼 있어야 한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대책과 준비의 정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마스크와 손 세정제 대란이 대표적이다.

보통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은 비합리적이기는 해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공포와 불안에 따른 패닉 현상도 대비해야 하지만, 무한정 대비할 수는 없다. 어디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인가. 답은 과학과 이성적 판단에서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것은 주장이 아니라 실증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적 이해관계가 끼어들어 과학과 이성을 정치화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판단과 실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 구성원의 관용과 인내만이 균형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향하는 웰다잉 운동 역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죽음 준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웰다잉은 세 가지를 목표로 한다. 첫째는 연명 치료 거부, 호스피스 완화치료, 장기기증 등 육체적 생명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둘째는 엔딩 노트와 유서 쓰기, 장묘문화 개선 등 사회적 관계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셋째는 유품 사전정리, 사회적 유산기부, 성년후견제도 등 사회적·물질적 유산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이 세 가지 삶의 마무리를 균형감 있게 실천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셈이다.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