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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원로 개혁연합까지 '팽'···의회를 장악해 버린 정치팬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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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의 인간혁명]21세기 'on liberty'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일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린다. 양 원장과 조국 전 장관, 문 대통령이 토크콘서트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양정철. 2018년 1월11일]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일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린다. 양 원장과 조국 전 장관, 문 대통령이 토크콘서트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양정철. 2018년 1월11일]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정당의 플랫폼으로 ‘시민을 위하여’를 선택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친문·친조국 성향의 개국본(개싸움국민운동본부)이 주축입니다. 지난해 ‘조국 수호’를 외치며 서초동 집회를 주도했던 세력이죠. 진보 진영의 내분까지 빚어지며 정말 '개싸움'처럼 비화되는 양상입니다.

반면 ‘비례민주당’의 우선협상 대상이었던 정치개혁연합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됐습니다. 개혁연합엔 진보성향의 원로들이 포진해 있어 그 동안 여러 번의 선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기에 그 동안 진보 정당 내에서의 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연합은 어쩌다 ‘팽을 당한’ 걸 까요?

개혁연합의 하승수 집행위원장은 주동자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을 지목했습니다. 그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양 원장에 대해 “적폐 중의 적폐다. 이런 사람이 집권여당의 실세 노릇을 하고 있으니 엉망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 중진들조차 양정철씨 눈치를 보는 듯하다. 민주화운동 원로에 대한 마타도어를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양정철은 개국공신, 이낙연은 데릴사위" 

지난 10월 당정청 회의에 참석한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조국 법무부 장관. 김상선 기자

지난 10월 당정청 회의에 참석한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조국 법무부 장관. 김상선 기자

양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후보 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현 정권의 최고 실세중 한명입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양정철은 개국공신인 광흥창팀의 수장”이라면서 “이낙연은 PK 친문의 데릴사위로 성골 조국의 낙마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육두품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친문의 핵심은 친조국이라는 이야기죠. 그러면서 민주당의 정체성이 달라졌다고 지적합니다. “지금의 민주당은 과거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이 아니라 전체주의 정당의 이상한 변종이다, 철학과 이념이 아닌 적나라한 이권으로 뭉친 집단”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지난해 ‘조국사태’를 민주당의 정체성이 드러난 핵심사건으로 꼽습니다.

지난주 ‘인간혁명’에서는 ‘조국사태’ 이후 진보 진영이 반지성주의적 관점에서 둘로 쪼개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내부의 건전한 비판과 합리적인 지적도 정치 팬덤이 만들어 놓는 진영 논리를 벗어나는 순간 매장된다는 것이었죠. 그 대표적 희생양이 진 전 교수와 김경율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그리고 금태섭 의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둘로 쪼개 놓은 ‘진영 논리’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일까요. 그 핵심은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키는 반지성주의입니다. 오늘은 2019년 하반기 ‘조국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커져왔는지 ‘인지적 편향’의 이론으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따져보겠습니다.

왜 21세기 '온리버티'인가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on liberty)』은 J.S. 밀이 1859년 출간한 자유주의의 교과서입니다. 철학에서의 ‘자유의지’와 달리 ‘사회적 자유’란 무엇이며,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깊은 통찰력으로 논했습니다. 밀은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역사를 발전시키는지 체계적으로 논증한 최초의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온리버티’는 새 시대에 걸맞은 21세기의 ‘on liberty’라는 뜻과 ‘only liberty’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only liberty’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처럼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의 모든 권리와 가치를 하나씩 제거해 나갈 때 최후에 남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 뿐(only liberty)이라는 이야기죠.
   ‘온리버티’는 인간 이성의 마지막 보루인 자유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합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끝나고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날카로운 현실 비판과 인문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인간은 원래 불합리하다?

 행동경제학에서 자주 쓰이는 ‘인지적 편향’은 인간의 판단과 의사결정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을 시스템1과 시스템2로 나눠 설명하죠. 시스템1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며 시스템2는 복잡한 계산을 포함한 집중력과 주의력을 필요로 하는 방식입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놓고 시스템2를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에서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시스템1의 인간을 전제합니다. 시스템2에서 인간의 비이성적 판단과 의사결정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하는 개념 중 하나가 인지적 편향입니다.

 이는 다시 네 가지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생각과 말에 그치기보다는 실행하는 게 무조건 낫다는 행동 편향, 평소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소식에 더 끌리는 부정 편향, 실체적 진실보다 잘 짜인 이야기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이야기 편향입니다.

'조국 사태'에 드러난 반지성주의 

지난해 12월 조국수호와 검찰개혁,공수처 설치 등을 촉구하는 집회.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조국수호와 검찰개혁,공수처 설치 등을 촉구하는 집회. [연합뉴스]

 ‘조국 사태’는 네 가지 편향이 복합돼 나타나면서 반지성주의를 키웠습니다. 제일 먼저 조 전 장관을 둘러싼 광장의 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9월 28일 서울 서초동 집회입니다.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 주최로 오후 6시부터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집회 주최 쪽 추산 200여 만 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검찰개혁 조국 수호 서초동 촛불집회…주최 쪽 200만 명 참석’. 한겨레신문. 2019. 09. 30)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경북 영천에서 중2 딸의 손을 잡고 새벽 6시에 상경했다는 한 시민은 “딸의 중간고사가 코앞이지만, ‘조국 장관 사태’를 지켜보며 시민으로서 한 사람이라도 나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조국 장관 청문회와 그 이후 검찰과 언론이 모두 한 사람을 몰아세우고 괴롭히는 게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집회에 나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행동 편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행동하지 않는 건 죄악으로 여겨진다”는 강준만 교수(‘왜 대중은 반지성주의에 매료되는가’. 정치정보연구22)의 지적처럼 조 전 장관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내건 ‘조국 수호’라는 구호처럼 일단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혐오를 수반하는 행동편향 

지난해 10월 조국 사퇴를 요구하는 광화문 집회 현장. 임현동 기자

지난해 10월 조국 사퇴를 요구하는 광화문 집회 현장. 임현동 기자

 그런데 행동 편향은 강 교수의 표현처럼 “과도한 혐오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인터넷 실검 전쟁에서 소위 진보 진영의 네티즌들은 조국 전 장관을 비판한 언론에 대해 ‘기레기꺼져’ ‘기레기아웃’ ‘가짜뉴스아웃’ 등을 검색 순위에 올렸습니다. 행동 편향은 깊은 성찰과 진지한 고민 없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조 전 장관을 반대하며 광화문에서 맞불 집회를 벌인 보수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나타나기 쉬운 확증 편향은 진영 논리를 강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확증 편향이 위험한 것은 자신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팩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쪽으로 치우쳐 있고 본인 자신 또한 그 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같은 사실을 알고 있고 의견만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면, 대화나 토론을 통해 합의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확증 편향이 심한 사회에서는 각자 틀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서로가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를 찾기 힘들죠. 취득하는 정보와 팩트부터 다르기 때문에 두 집단의 골은 더욱 깊어집니다.

진실이 된 가짜뉴스 

 이처럼 서로 다른 팩트를 갖게 되는 이유는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현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언론은 게이트키핑이라는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쳐 사실을 뉴스로 가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관적인 편집과 사실의 배제는 일정 부분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전통의 주류 미디어는 겹겹의 게이트키핑 과정을 통해 주관을 거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이 줄면서 가짜 뉴스를 적극 유포하는 대안 미디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겐 마땅한 게이트키핑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문에 정치 셀럽들의 유튜브·팟캐스트 등 뉴미디어는 자기 진영의 사람들을 결집하고 확증 편향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론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공정성과 객관성을 제일 높은 가치로 꼽지만, 대중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극적이고 편파적인 언론사를 좋아합니다. 2011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조사 결과 폭스뉴스 시청자는 오바마 행정부의 강력한 경기부양책 때문에 실업률이 증가한다고 믿는 비율이 다른 방송사보다 12% 포인트 높았습니다. 무슬림이 미국 내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17%포인트나 높았죠. 이는 방송 시청 시간이 길수록 심각했습니다.

확신은 혐오와 비난을 부른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 [연합뉴스·뉴스1]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 [연합뉴스·뉴스1]

 확증 편향은 보통 부정 편향을 함께 수반합니다.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부정 편향은 뉴스를 소비하는 중요한 패턴 중 하납니다. 부정 편향은 내 편과 네 편을 쉽게 나누고, 나와 다른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기 쉽습니다. 매 선거철마다 정책·공약 선거보다 상대 후보를 흠집 내는 네거티브 선거가 파괴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부정 편향의 효과입니다.

 ‘조국 사태’ 때도 진보와 보수 각 진영은 반대편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내는 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보수 진영은 조 전 장관의 부정적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을 집중적으로 보고, 진보 진영은 반대로 조 전 장관을 비판하는 이들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냈습니다. 조 전 장관 딸의 입시 문제가 거론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아들 문제로 맞불을 놓은 게 대표적인 사례죠.

 또 조 전 장관의 아내인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 문제가 논란이 되자 정 교수가 몸담고 있는 동양대 최성해 총장에 대한 ‘신상 털기’가 이뤄졌습니다. 최 총장이 정 교수에게 불리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최 총장에 대한 온갖 부정적 뉴스가 흘러 나왔고, 진보 진영의 사람들은 이를 확대 재생산했습니다. 그 결과 동양대는 교육부의 전격적인 감사를 받았고, 최 총장은 법인 이사직에서 물러났죠.

 부정 편향에 빠진 상황에선 자기 생각과 의견에 맞지 않으면 일단 적으로 만들고 부정적인 이슈들을 재생산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에 대해 ‘믿고 거르는 종양일보’, ‘역시나 한걸레’ 같은 과격한 표현이 댓글에 난무하는 것도 부정 편향 때문이죠. 기자를 ‘기레기’로 규정하고 나면, 메시지를 보기도 전에 메신저부터 공격하는 효과가 있어 부정 편향은 더욱 강해집니다. 이처럼 한국의 언론과 뉴스 소비자는 확증·부정 편향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내일 '인간혁명'에서는 음모론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부추기고, 그 해법은 무엇이 있을지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석만 사회에디터 겸 논설위원 sam@joongang.co.kr

#유튜브에서도 인간혁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Ipp-I9olmN4

윤석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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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2018 세종도서),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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