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소재 공포영화 ‘인비저블맨’(감독 리 워넬)이 코로나 공포를 뚫고 4주째 극장가 흥행 1위에 올랐다. 지난달 26일 개봉해 4주차에 접어든 19일까지 누적 45만 관객을 동원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공포와 텅 빈 극장이 맞아 떨어져서일까. 하루 관객 수가 3만 6000명대로 주저앉은 16, 17일도 각각 8000명 안팎이 이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4주째 흥행 1위 '인비저블맨' #투명인간 공포 맞선 여성 사투 #호러퀸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 #"우리 시대, 여성…위대한 은유"
영화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소시오패스 과학자 남편에게서 도망친 세실리아가 남편의 자살 소식과 함께 500만 달러(약 60억원)의 유산을 상속 받은 뒤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에 위협 받는 내용이다.
1993년 영화 '투명 인간'의 재해석
할리우드 영화사 유니버설 픽쳐스가 과거 괴수물의 영광을 되살리려 만든 ‘다크 유니버스’의 일부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동명 소설을 1933년 영화화한 ‘투명 인간’이 토대지만, 원작이 미치광이 과학자가 직접 개발한 약을 마시고 투명인간이 된 잔혹 소동극에 가깝다면 이번 영화는 첨단 광학 철학을 투명인간 캐릭터에 적용한 본격 공포영화다. 남자 투명인간이 아닌 여성 주인공에 힘을 실은 것도 달라진 점이다.
투명인간보다 더 무서운 여주인공
“그는 죽지 않았어요. 보이지 않는 법을 알아낸 거예요.” “지금 (그가) 다 듣고 있어요.” “난 미치지 않았어.”
혼자만의 공포 속에 피폐해져가는 세실리아. 투명인간에 맞서기 위해 그는 자해도 서슴지 않는다. 진짜 투명인간이 있는 걸까. 이 모든 게 그의 망상은 아닐까. 극 중 주변 인물들과 더불어 관객도 추리에 초대된다.
할리우드 저예산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의 노련함에 더해 주연 엘리자베스 모스(38)의 연기가 가슴 조이는 공포를 빚는다. 북미 영화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 신선도, CGV 예매앱실관람평이 나란히 91%에 달한다. 포털사이트 베스트 댓글 중에도 “투명인간보다 더 무서운 여주인공”(pdma****) "여주 표정연기 미쳤다“(xhbh****) 등 배우에 대한 감탄이 많다.
감독 '핸드메이즈 테일' 보고 캐스팅
친구 제임스 완 감독과 함께 작가이자 배우로서 ‘쏘우’ ‘인시디어스’ 등 공포물을 성공시켜온 리 워넬 감독은 각본과 총괄 프로듀서를 겸한 이 영화를 만들며 그가 대체 불가능한 주연 배우였다고 영화사에 전했다.
“세실리아처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타입의 캐릭터라면 너무 과장되거나 극적인 연기를 보여주기 십상이다. 정신을 놓아버린 연기를 하되 사실적으로 설득해낼 사람이어야 했다. ‘핸드메이즈 테일’에서 엘리자베스 모스는 극적으로 재구성된 상황과 현실을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모스, TV 황금기의 여왕
모스는 최근 영미권에서 가장 물오른 배우 중 하나다. 특히 TV 장르물 속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고향은 미국 LA. 영국인 아버지, 스웨덴계 어머니 슬하에서 사이언톨로지교도로 자랐다. 8살에 미국 TV 영화 ‘바 걸스’로 데뷔했다. 오랜 무명을 청산한 건 1999년 백악관 무대 드라마 ‘웨스트 윙’에서 대통령의 사랑 받는 막내딸을 연기하면서다.
1960년대 뉴욕 광고계를 그린 ’매드맨‘ 시리즈로 2009, 2010년 연속 미국배우조합 TV 드라마 앙상블상을 들어 올린 뒤부터는 거장도 탐내는 배우가 됐다.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 감독이 제작‧연출에 참여한 드라마 ’탑 오브 더 레이크‘에선 소녀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역, 스웨덴의 루벤 웨스틀룬드 감독의 영화 ’더 스퀘어‘에선 원숭이를 키우는 괴짜 기자 역을 맡아 두 작품이 모두 2017년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더 스퀘어‘는 황금종려상까지 받았다.
‘탑 오브 더 레이크’에 이어 가부장제와 성경 근본의 전체주의국가에서 감시당하는 여성들을 그린 ‘핸드메이즈 테일’로는 각각 제71회 골든글로브 TV 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 제75회 골든글로브 TV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TV 황금기의 여왕(the Queen of Peak TV)'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조던 필 감독의 공포영화 ‘어스’에선 소름 끼치는 1인 2역을 선보였다.
투명인간과 육탄전 혼자 연기
그런 그에게도 이번 영화는 도전이었다. 상대 배우가 무려 투명인간인 탓에 문자 그대로 ‘혼자 다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허공에 대고 겁에 질리는 건 예사고 투명인간과 육탄전까지 벌인다.
세실리아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내동댕이쳐지는 주방 액션 장면은 실제론 모스의 몸에 하네스(몸줄)를 묶어 제작진이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촬영했다. 컴퓨터 그래픽(CG) 단계에서 사람을 지울 때 사용하는 초록색을 옅게 칠해 투명인간의 윤곽이 약간 느껴지게 만든 특수 수트 차림의 대역 배우, 컴퓨터로 움직임을 제어하는 모션컨트롤 카메라 등 첨단 기술도 동원했다.
공포 효과만이 아니다. 약에 취해 혼절하는 가련한 아내에서 거의 전사로 거듭나는 캐릭터 변화도 온전히 그의 연기에 기댄다. 그의 개성 강한 얼굴은 각도를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 인상이 돌변한다. 덩달아 보는 내내 긴장을 조였다 풀었다 하다 보면 영화가 끝난 뒤엔 온몸이 다 저린 기분이다.
리 워넬 감독은 “엘리자베스 모스는 진실성이란 측면에서 우리 영화의 검열관이기도 했다. 어떤 장면이 사실적이지 않다거나 설득력이 떨어지면 문제를 제기했다”면서 “‘액션’을 외치는 순간 100%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전했다.
"우리 시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시간" 은유
주연·제작을 겸한 ‘핸드메이즈 테일’ 등을 통해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내온 모스는 이번 영화도 "진짜 페미니스트 이야기라 느꼈다"고 했다. 미국 매체 할리우드리포터와 인터뷰에서다. 그는 이 영화의 본질을 투명인간 이전부터 세실리아를 괴롭혀온 보이지 않는 공포에서 찾았다. 세실리아는 성공한 건축가였고 야망도 있었지만, 남편 에이드리언(올리버 잭슨 코헨)의 통제 속에 자신을 잃어간다. 애초 세실리아란 이름도 맹인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따왔다.
“이런 유형의 관계는 그 자체로 해롭다. 이 영화가 이런 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는 영화가 되면 좋겠다.” 모스가 영화사에 전한 말이다. 그는 “세실리아는 힘들었던 과거를 이겨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한다”면서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위대한 은유이며 우리 시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나의 시간과도 조응한다”고 했다.
'핸드메이즈 테일' 시즌4서 연출데뷔
아직 속편 여부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인비저블맨’의 성공으로 엘리자베스 모스는 ‘다크 유니버스’ 시리즈에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는 새로 나올 ‘핸드메이즈 테일’ 시즌4에선 한 에피소드의 연출로도 데뷔한다.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커넥션’에도 출연했다.
“난 단지 어쩌다 보니 아이였던 전업 배우였다. 10대 때 ‘웨스트 윙’에 출연하기 전까진 히트한 작품도 없었다. 히트작으로 스타가 되지 않은 것, 그게 내 최후의 보루였다. 그 덕분에 나는 계속 일하며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무게중심이 낮은 배우의 우직한 회고다. 그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1999)의 힐러리 스웽크 같은 새로운 배우들이 영감이 돼줬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그 스스로가 영감을 주는 배우가 됐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