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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광우병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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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에 오염된 전문가가 망가뜨리는 사회

지난 2008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모습. 당장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싶다“는 피켓을 든 어린 학생도 많았다. 나중엔 폭력 시위로 변질됐다. 뒤편에 청와대 진입을 막기 위해 쌓은 컨테이너 박스가 보인다. [중앙포토]

지난 2008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모습. 당장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싶다“는 피켓을 든 어린 학생도 많았다. 나중엔 폭력 시위로 변질됐다. 뒤편에 청와대 진입을 막기 위해 쌓은 컨테이너 박스가 보인다. [중앙포토]

한국에선 과학적 사실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춤을 춘다. 여기엔 진영 논리에 갇혀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확대재생산 하는, 이른바 ‘정치에 오염된 과학자(전문가)’ 그룹이 있다. 과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전문가들이 스스로 진영의 대변인으로 전락할 때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크다. 전문가 타이틀을 내세워 공포를 과장해 끝내 집단 광기를 불러일으킨 지난 2008년 광우병 소동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진짜 위험인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는 당시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광우병 선동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 #인의협, 권위 앞세워 보수정권 공격 #정권 바뀌니 잣대 바꿔 방패 노릇 #진영 갇힌 전문가들의 폐해 커져

“대통령은 국민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다. 생명과 건강에 관계된 문제는 확률로 따질 수 없다. 국민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 정부다. 불필요한 위험을 끌어들여 놓고 걱정되면 알아서 피하라고 하는 정부는 올바른 정부가 아니다. 우방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은…함께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라…정책을 재점검하는 것이다. …엄밀히 감독하여 세계적인 확산을 방지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 …정부는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였고, 그 위험에 대해 국민과 소통하려는 노력도 부족하였다.”

이 선언문은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코로나19 확진자가 국내서 발생한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을 위한 입국 금지 문제와 마스크 정책 등을 놓고 문재인 정부와 대립했던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쓴 게 ‘아니다’.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놓고 서울대 의대 K·H 교수 등 의사 340명이 참여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가 썼다. 13만 회원의 의협에 비해 인의협은 회원 5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재야 단체지만 좌파 시민단체와 연대해 광우병과 메르스 사태 당시는 물론 지금 코로나 국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땐 이명박·박근혜 정부 공격의 최전선에, 지금은 문재인 정부 방어의 맨 앞줄에 서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난 2006년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열린 ‘광우병 위험을 우려하는 보건의료인 1174인 시국선언’ 참가자들. [연합뉴스]

지난 2006년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열린 ‘광우병 위험을 우려하는 보건의료인 1174인 시국선언’ 참가자들. [연합뉴스]

인의협이 2008년 주최한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 토론회에선 정부의 모든 조치를 거짓으로 규정하고 증거도 없이 “미국 정부도 안전성 문제를 알지만 축산업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외면한다”고 주장했다. 분명 토론인데 같은 생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인이 걸릴 위험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며 공포만 부추겼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발생지인) 영국에서도 100만분의 1 확률이고 이마저도 관리하면 미미하다”는 연세대 예방의학과 신동천 교수 등의 연구를 받아들여 일관되게 “위험론이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인의협은 “페스트처럼 전 인구의 반이 죽어 나가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괴담 수준의 잘못된 정보가 전문가의 정설처럼 퍼지자 정부는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광우병 10문 10답’을 내놓았지만 인의협은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달 뒤 주수호 당시 의협 회장과 주요 대학 병원장들이 함께한 미국산 쇠고기 시식 행사를 놓고 “분노한다”는 규탄 성명을 냈다.

이제는 누구 말이 맞았는지 안다.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는 그때까지 딱 2마리였고, 지금까지도 늘지 않았다. 지난해 국내에 수입된 쇠고기 53%가 미국산이었고, “서민은 10년 후 광우병에 걸려 죽을 수 있는 쇠고기를 먹으란 말이냐”며 선동하던 인의협 말과 달리 아무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다.

겉으론 국민 건강을 내세웠지만 촛불시위 때 여중생들 손에 쥐여준 ‘이명박 OUT’이란 피켓처럼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국민 모두가 짊어졌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그해 5~8월 2398회나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와 시위로 2007년 국내총생산(GDP) 0.4%에 해당하는 3조 7513억원의 사회적 손실을 봤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광우병 선동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광우병 선동

광우병 논란 당시 정부를 찌르는 창 노릇을 했던 인의협은 코로나 국면엔 문재인 정부의 방패로 나섰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게 정부”라던 10여 년 전 주장이 무색하게 감염원 차단이라는 방역의 기본원칙대로 중국발 입국자 제한을 7차례 요구한 의협은 깎아내리고, 중국 눈치 보느라 중국발 입국 금지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정부를 옹호하고 있다.

의협은 지난 2월 24일 중국발 입국 제한을 요구하는 7번째 성명서에서 “무증상 감염자도 상당한 감염력을 지닌다는 게 최근 의학적 연구에서 밝혀진 만큼 유증상 자를 걸러내는 것으로는 해외 감염원을 차단할 수 없다”는 과학적 증거를 첨부했다.

반면 인의협은 지난달 25일과 3월 10일 성명에서 “국제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비과학적 주장…최대집 의협 회장은 잘못된 중국인 혐오를 자극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보수언론과 정치집단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과학적 근거는 없었다. 대신 ‘중국발’ 입국 금지를 ‘중국인’ 입국 금지로 표현하며 정부에 반하는 전문가들에 교묘한 혐오 프레임을 씌웠다. 이와 관련해 인의협의 공식 입장을 들으려 했으나 “보수 언론과는 일절 대화하지 않는다는 게 인의협 내규”라는 답만 들을 수 있었다.

광우병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수년이 흘렀지만, 방역 문제는 금세 진실이 드러났다. 인의협을 비롯한 몇몇 친정부 성향의 전문가들 주장과 달리 전대미문의 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세계 각국은 속속 입국 금지에 나서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보이지 않고 규정할 수도 없는 적(코로나19)과 전쟁 중”이라며, 또 메르켈 독일 총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두 나라 모두 유럽 내 자유로운 이동을 약속한 솅겐 조약을 무력화하면서까지 외국으로부터의 입국을 막았다. 그 나라에서 코로나를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치부하며 “외국인 혐오와 정치적 노림수”라며 다른 전문가 입을 막는 방역·감염병 전문가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무엇이 정답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각국 정상은 최소한 현재의 과학적 기반으로 조언하는 전문가 의견에 귀를 기울여 정책 결정을 내렸다. 정치는 과학 뒤로 물러났다. 정권 입맛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모르는 걸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과학적 기반 위에 조언하는 전문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트럼프 미 대통령조차 아닌 건 아니라고 맞서는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이 있어 늦게나마 제대로 된 정책 결정을 했다.

우리는 달랐다. 지난달 청와대에서 열린 의료 전문가 회의에서 문 대통령 의중에 맞서 중국발 입국 제한을 주장한 사람은 백경란 감염학회 이사장 한 사람뿐(※청와대 설명)이었다.

이렇듯 과학을 정치 뒤에 놓는 어용 전문가들이 창궐하니 오로지 정부 책임인 방역 실패로 인해 의료 과부하가 걸려 의료진 고생시키고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의료진의 헌신과 민간기업의 발 빠른 대처, 차분한 시민의식을 정권 치적으로 홍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중국 작가 옌롄커는 ‘국가적 기억 상실을 거부한다’는 글을 통해 “국민이 고통받는데 중국 공산당은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진실을 호도한다”고 비판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가공송덕(공적을 노래하고 덕을 칭송함) 노랫소리만 울려 퍼진다”는 작가의 탄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사전예방의 원칙’이 뭐길래

의협은 지난달 18일 “심각하고 되돌릴 수 없는 위협의 가능성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과학적으로 확실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사전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전예방의 원칙’을 상기해야 한다”며 “코로나19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하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안전과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부는 무증상 감염과 공기 전파 가능성 모두 일축했으나 무증상 감염은 이미 확인됐고, 17일엔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가 “공기 중 수 시간 전염성을 유지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최재욱 의협 과학검증위원장(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은 “사전예방 원칙의 적용에 있어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인의협 역시 2008년 사전예방 원칙을 내세워 광우병 위험을 부각시킨 데 대해선 “당시엔 명백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데도 무시하거나 과장했기에 지금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