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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도성장 뒤엔 자이니치 가족의 애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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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정의신 감독의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을 스크린으로 옮긴 ‘용길이네 곱창집’. [사진 퍼스트런]

정의신 감독의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을 스크린으로 옮긴 ‘용길이네 곱창집’. [사진 퍼스트런]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용길이네 곱창집’을 찾아주실지 걱정되지만, 한국 관객들은 좋은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교포 연출가 정의신 영화감독 데뷔 #‘용길이네 곱창집’ 국내서 개봉 #일본 울린 가족사 담은 연극이 원작 #김상호·이정은 연기로 실감 더해

자신의 유년기를 녹인 희곡을 토대로 첫 영화 연출에 나선 재일교포 2.5세 정의신(63) 감독의 말이다. 12일 개봉한 ‘용길이네 곱창집’은 극작가인 그가 2008년 쓰고 연출한 한·일 합작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이 바탕이다. 1969년 전후, 오사카 공항 근처의 가난한 재일한국인 마을에서 한국식 곱창집을 하는 재혼 부부 용길(김상호), 영순(이정은)과 4남매의 고락을 그렸다.

“1950년대부터 1970년에 걸친 고도성장은 일본에 큰 번영을 가져왔고, 그 상징이 1970년 만국박람회와 박람회를 위한 간사이공항 확장공사였다. 거기에 많은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일본의 번영을 한국인 노동자가 뒤에서 받치고 있었던 거다. 가난과 차별 속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13일 중앙일보와 e메일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오사카 판자촌에 깃든 내 아버지 이야기

‘용길이네 곱창집’에서 용길(김상호)의 둘째딸 역을 맡은 사쿠라바 나나미(오른쪽)와 그와 불륜 관계로 나오는 오타니 료헤이. [사진 퍼스트런]

‘용길이네 곱창집’에서 용길(김상호)의 둘째딸 역을 맡은 사쿠라바 나나미(오른쪽)와 그와 불륜 관계로 나오는 오타니 료헤이. [사진 퍼스트런]

주인공 용길은 태평양 전쟁에 강제 징용돼 한쪽 팔을 잃고 제주 4·3 사건으로 돌아갈 고향 마을까지 없어졌다. 재혼해 낳은 막내아들 토키오(오오에 신페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위태로운 상태다. 용길이 돈을 주고 산 곱창집 땅도 구청에선 국유지라며 퇴거하라 채근한다.

“세상은 고도성장이란 기차를 타고 번쩍번쩍해져 가는데 이 동네만은 옛날 그대로다.” 영화를 이끄는 토키오의 내레이션이다. 정 감독은 “창작 반 사실 반”이라며 “나보단 아버지 이야기”라 했다.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히메지성의 돌담을 따라 전후 땅이 없는 사람들이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장소”라며 “국유지였지만, 아버지는 그 땅을 돈 주고 샀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 동네는 없어져 공원이 됐다. 아버지와 내가 산 마을이 영화 속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그는 돌이켰다.

“일하다 일하다 보니 이 나이가 됐다” “재일교포는 모순덩어리야. 차별과 편견을 받으며 일본을 미워하고 한국을 그리워하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해” 등 영화 속 대사는 그가 어릴 적 자주 듣던 말이다.

용길의 아내 영순 역 배우 이정은. 정 많고 억척스러운 어머니를 연기했다. [사진 퍼스트런]

용길의 아내 영순 역 배우 이정은. 정 많고 억척스러운 어머니를 연기했다. [사진 퍼스트런]

처절한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원천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의 영향이 많다. 그곳에는 가난해도 어두운 사람이 없었다. 인간의 교활함, 상냥함, 씩씩함을 아이의 마음에 가르쳐줬다.”

정 감독은 일본의 주류 문화계에서 재일교포·하층민·동성애자 등 비주류의 이야기를 선보여온 극작·연출가다. 1993년엔 일본 연극계의 권위 있는 기시다 희곡상을 받았다.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2005)로 일본 아카데미 각본상도 받았다.

영화 대사는 90%가 일본어다. 부부 역의 김상호·이정은이 일본 배우 마키 요코, 오오즈미 요 등과 한국어와 능청스러운 오사카 사투리를 오가며 호흡을 맞췄다. 오사카 억양 전문 강사가 촬영 현장에 상주했단다.

핏줄이 다른 4남매의 어머니를 연기한 이정은은 2년 전 영화가 개막작으로 상영된 전주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 영화를 만나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배웠다”면서 “함께 출연한 일본 배우들이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라며 연락이 왔다. 따뜻하고 즐겁게 작업했다”고 돌이켰다.

정의신 “‘기생충’ 마지막에 눈물 났다”

정의신 감독

정의신 감독

정 감독은 김상호·이정은에 대해 “연극 경험이 있고 무대와 영화에 정통하다는 것, 무엇보다 내가 그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가장 가까운 캐릭터였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나.
“영화 마지막에 이뤄질 수 없는 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봉 감독의 따뜻한 시선을 느꼈다. (이)정은의 연기는 순종적인 가정부이면서도 그 속에 어둠이 깃든 인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냈다. 있을 수 없는 인물을 마치 존재하는 인물인 것처럼 연기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원작 연극은 2008년 초연 당시 화제를 모으며 한국에서 두 차례, 일본에선 세 차례 공연됐다. 정 감독은 “재일교포의 작은 가족 이야기가 이렇게 일본인의 마음을 설레게 할 줄 몰랐다”며 “이민 이야기, 땅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고향에서 쫓겨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가족애를 담은 얘기이기도 하다. 그것에 일본인, 한국인. 다른 외국인들도 많이 공감해주는 것이라고 느꼈다”고 돌이켰다. 이어 “나도 재일교포로서 소수자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소수자 문제에 다방면에 걸쳐 귀 기울이고 싶다”고 했다.

전주에서 영화가 처음 소개된 뒤 한·일 관계가 계속 나빠졌다.
“한·일 간 문화교류 끊기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그동안 ‘용길이네 곱창집’을 비롯해 한·일관계에 대한 생각이 결집한 작품으로 신뢰를 쌓았는데 그 열의와 노력이 일축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 그는 제작·연출한 연극 ‘우는 로미오와 분노하는 줄리엣’ 공연이 코로나 19로 인해 취소된 상태지만 여러 신작을 준비 중이다. 영화 차기작도 구상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한국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 지금까지의 정의신 스타일이 아니라 ‘하드한’ 작품에 도전하려 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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