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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비비탄 총알도 보석으로 바꾸는 것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20)

요즘은 코로나19로 거의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은지는 심심해서 몸이 배배 꼬일 정도다. 유치원 입학식도 연기됐고, 매일 가고 싶은 미술학원도 휴원 중이다. 집엔 텔레비전도 없고,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도 한계를 느끼고 있다. 간혹 동네 마트에 나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다.

우유 하나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은지가 아파트 놀이터 쪽으로 손을 잡아끌더니 미끄럼틀 한 번만 타고 가자고 졸랐다. 한산한 놀이터엔 아이들 너댓명이 놀고 있었다.

집 앞 놀이터에서 비비탄 총알을 주운 은지. 작은 총알도 은지 눈엔 보석으로 보인다. (사진은 친모의 동의를 얻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사진 배은희]

집 앞 놀이터에서 비비탄 총알을 주운 은지. 작은 총알도 은지 눈엔 보석으로 보인다. (사진은 친모의 동의를 얻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사진 배은희]

쓩 미끄럼틀을 타고, 빨리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은지가 갑자기 흙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뭔가 싶어 봤더니 하얀 비비탄 총알을 줍고 있었다. 은지는 보석을 발견한 듯 놀라워하며 하나하나 주웠다. 그걸 보는데, 내 유년이 흑백사진처럼 겹쳐졌다.

“은희야! 밥무라!”
붉은 노을이 마블링처럼 번지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밥으로 내 놀이를 뚝 끊어버렸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데 왜 밥, 밥,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안 먹을래요!”
크게 소리치고 조금 더 놀았지만, 어머니의 끈기엔 당할 수가 없었다.

“니, 진짜 밥 안 묵나?”
악센트가 들어간 말에 뜨끔했다. 여러 번 말해도 듣지 않으면 나중엔 더 크게 혼날 게 뻔했다. 어머니는 입술을 쭉 내밀고 위아래로 날 쳐다보며 마룻바닥을 탁탁 치실 테니까.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어머니의 밥 먹으란 소리에 한풀 꺾여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땐 늦게까지 뛰어놀았다. 마치 놀기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놀면서 배운다. 놀면서 자기 것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하면서 관계도 배운다. 나도 그랬다. 모래로 밥을 하고 햇살로 국을 끓이면서 서로 나누는 게 행복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웠다.

그땐 어른들도 동네 아이들을 서로서로 챙겼다. 옆집 아이도 밥을 주고, 뒷집 아이도 재워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화와 사고는 ‘가정위탁’의 이념과 비슷한 데가 있다. 이웃끼리 챙겨주던 공동체 의식은 현재 가정위탁을 하는 위탁엄마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내 아이만 잘 기른다고 잘 자랄 수 있는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내 아이가 만나는 친구들, 내 아이가 접하는 환경을 같이 보호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지는 세상이 돼버렸다.

그땐 어른들도 동네 아이들을 서로 서로 챙겼다. 옆집 아이도 밥을 주고, 뒷집 아이도 재워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화와 사고는 ‘가정위탁’의 인념과 비슷한 데가 있다. [사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그땐 어른들도 동네 아이들을 서로 서로 챙겼다. 옆집 아이도 밥을 주고, 뒷집 아이도 재워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화와 사고는 ‘가정위탁’의 인념과 비슷한 데가 있다. [사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옛날이 그립다.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놀고, 친구네 집에서도 밥 한 끼 얻어먹던 그때가 사뭇 그립다. 코흘리개 친구도, 구구단을 못 외우는 친구도 모두가 어울려서 늦게까지 뛰어놀았던 그때.

바닥에서 주운 비비탄 총알을 보석처럼 움켜쥐는 은지를 보면서 내가 잃어버린 동심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는 나의 동심은, 은지랑 닮았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지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까치발로 깡충깡충 뛰며 콧노래를 불렀다. 동심은 비비탄 총알도 보석으로 바꾸고, 무거운 발걸음도 날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지친 지금. 아이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이 시간 너머에 있는 보석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하면서 활짝 웃고 있지는 않을까?

햇빛이 찬란한 오후. 보석 같은 은지 손을 잡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정위탁 포스터.

가정위탁 포스터.

* 가정위탁제도란? 부모의 학대, 방임, 질병, 이혼 등의 사정으로 친가정에서 양육할 수 없는 경우, 복지시설이 아닌 위탁가정에서 일정기간 보호·양육하는 제도다. 2003년 우리나라에 도입됐다.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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