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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콜하기 딱 좋은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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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삶의 풍경을 확 바꿨다.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다. 코로나19로 가장 크게 바뀐 건 역시 일터 문화다. 웬만한 직장치고 재택근무를 하지 않는 곳이 드물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종 근무체계를 대한민국 근로자 누구나 경험했다. 노사 간 의견대립으로 확산이 더디기만 하던 유연근무체계가 어느새 일상이 됐다. 코로나19의 위협 뒤에 이런 긍정적 면도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코로나19로 경제와 고용시장은 만신창이다. 한데 그 충격의 역설이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 사태가 고용정책 전반을 점검하고 돌아볼 계기를 제공하고 있어서다. 일자리 정책 리콜의 기회가 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코로나19의 감염 위험 못지 않은 #소주성 정책에 대한 방역도 필요 #경직돼 약발 안 먹히는 고용정책 #리콜해 문제 고치고 활력 넣어야

예컨대 이런 거다. 현대자동차는 최근 비정규직 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마스크를 두고서다. 정규직엔 1급 방진 마스크를 공급했다.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협력업체 직원에겐 부직포 마스크나 방한용 마스크를 줬다. 물론 정규직에겐 현대차가 지급했다. 협력업체 직원은 그들이 속한 회사로부터 받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현대차가 협력업체 직원을 홀대한 듯 보인다. 한데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파견법이 현대차의 선의를 막았다. 현행법에 따르면 원청이 협력업체 직원에게 물품을 직접 제공하면 불법파견 논란이 생긴다. “하도 불법파견이라고 하니 일괄 지급하기 겁난다”는 현대차 고위 간부의 볼멘소리가 영 근거 없는 건 아니다. 근로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데도 법을 따져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런 제도는 리콜하는 게 마땅하다.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이라는 전염성 강한 정책에도 방역 작업이 필요하다. 확진 판정을 받은 지 3년을 넘겼지만 치료는 더디기만 하다. 달리던 차에 불이 났는데 원인을 두고 아직도 다투기만 한다.

서소문포럼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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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다음 달부터 심의에 착수하는 최저임금부터 리콜을 검토해야 한다. 3년 동안 30% 넘게 오르면서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은 생존하느라 몸부림을 쳤다. 코로나19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김문식 한국주유소운영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지난 5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읍소했다. “코로나19 등에 의한 기업의 지불여력 감소와 경제상황을 고려해 최저임금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이 장관이 코로나19로 인한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듣기 위해 마련한 간담회에서다. 다행히 이 장관이 “여러 가지 경제 상황, 고용 상황을 보고 사회적 수용도가 반영될 수 있도록 결정해달라고 최저임금심의위원회에 의견을 내겠다”며 수용했다.

어디 최저임금뿐이던가. 코로나19 때문에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까 걱정이다. 서민에게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감보다 더한 공포는 없다. 그런 면에서 경직된 고용시장의 구조를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의도치 않게 코로나19로 재택근무, 시차출근제, 선택근로제 같은 유연 근무체계를 전국의 근로자들이 일시에 경험했다. 일터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으나 탄력적으로 일하니 고용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체득했다. 고용 정책 측면에선 소중한 자산이다. 이걸 토대 삼아 근무체계 혁신으로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유연근무를 실시하면서 문제점도 많이 노출됐다. 사회관계망(SNS)을 통한 무분별한 폭탄형 업무지시, 재택근무라는 이름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어지는 일 때문에 주70시간을 근무하는 불합리함 따위다. 이런 문제점을 정책적으로 보완한다면, 주당 최대 52시간제 시행에 따른 혼란과 문제점을 덜 수 있는 묘안이 의외로 쉽게 도출될 수도 있다.

돈을 퍼부어 만드는 노인 일자리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들을 취업자로 잡아 고용통계의 허수만 불리는 꼼수는 안 통한다. 노인 일자리를 두고 “민간 중심의 고용회복이 나타나고 있다”(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왜곡된 주장을 해서야 제대로 된 고용정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참에 일자리 정책으로 둔갑시킨 노인 일자리를 복지정책의 영역으로 재편하는 게 맞지 않을까.

당장은 코로나19의 거센 불길을 잡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어디에선가는 국가 장기 플랜을 짜는 노련한 정책 기능이 수행되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