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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딥톡]하루에 "넵"만 수십번···안달난 팀장, 지옥으로 변한 재택근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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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6만6163개. 국내에 있는 기업체 수(2017년 기준)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셈입니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중앙일보의 새 디지털 시리즈인 [기업 딥톡(Deep Talk)]에선 대한민국 기업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꿈ㆍ희망ㆍ생활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서울 종로의 한 대기업 사옥 사무실이 재택근무 실시로 텅 비어 있다. 뉴스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서울 종로의 한 대기업 사옥 사무실이 재택근무 실시로 텅 비어 있다. 뉴스1

재택근무 3주차. 많은 기업 임직원들이 회사 밖 공간에서 일을 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18일을 기점으로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불과 일주일 만에 1000명에 육박하자 주요 기업들은 부랴부랴 재택·원격·단축 근무에 들어갔다. 팀장·부서장·부문장 등 상사의 성향, 업무 방식에 따라 직원들의 근무 만족도도 엇갈리고 있다. 직장인들이 털어놓은 ‘코로나 재택 리더십’을 유형별로 들어봤다.

갑자기 닥친 재택근무 3주차 #팀장, 사내메신저에 카톡도 동원 #직원들 “넵 넵 하느라 정신 없다” #“필요한 지침만” 실무형 상사 인기

①안절부절 조급형 ‘메신저 노이로제’

서울 여의도의 대형 증권사에 근무하는 정 모 과장은 재택근무 이후 매일 아침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단톡방)에 군대 점호처럼 ‘안녕하십니까. 출근했습니다!’ 라고 인사를 남긴다. 출근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팀장이 정한 지침이다. 없던 일일 보고도 생겼다. 오전엔 그날 할 일을, 오후엔 업무 진척 상황을 일일보고 형태로 남겨야 한다. 팀장은 ‘반드시 내 말을 (대화방에서) 봤다는 답을 남기라’고 했고 십 수 명의 팀원은 말 한 마디마다 줄줄이 ‘넵’을 올리고 있다.

팀장이 단톡방에 수시로 궁금한 내용을 남기는데 문답이 길어지면서 대화창을 조금만 보지 않아도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정 과장은 “팀장이 직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확실히 불안해하는 것 같다. 혹시라도 일이 잘 못 되면 자기 책임이니 이해는 한다”면서도 “커뮤니케이션에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커서 업무 자체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국내 3대 대기업 계열사인 A기업은 보안상의 이유로 재택근무 시 업무 소통과 문서 공유 등은 사내 메신저로만 하게 했다. 하지만 김 과장은 카카오톡(카톡) 단체방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임원급 리더가 “얼굴을 못 보니 더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다”며 지시했다. 이후 직원들은 두 가지 메신저를 동시에 보고 동시에 답하고 있다. 때론 양쪽 메신저에 같은 내용을 복사해 올리고 내부 문서까지 카카오톡에 남기는 일도 비일비재해졌다.

특히 공식 채널인 사내 메신저로 하기 어려운 인신공격성 꾸지람이 크게 늘어 직원들 사이에선 ‘카톡이 깨톡(깨는 용도의 카톡)’이란 소리가 나온다. 김 과장은 “1분마다 카톡이 오가고, (상사가) 같은 업무도 하루에 2~3번씩 반복해서 물어보고 한 마디로 정신이 없다”며 “사무실 출근 때가 그립다”고 말했다.

②위기에서 빛나는 ‘똑부’형 

SK그룹 B계열사 본부장은 지난달 25일 재택근무 첫 날 메일로 팀원들에게 ‘비상근무 동안 부서 운영 지침’과 ‘누가 어떤 일을 해야할 지’를 정리해 공지했다. 특히 지시한 업무에 대해 본부장이 직접 예시를 들어 가이드라인을 보여줬다. 사람별로 업무 지시가 분명해지자 낭비하는 시간없이 일에 속도가 붙었다. 본부장 윗선인 부분장 역시 팀원들이 제출한 보고서 등에 대해 보완할 점과 궁금한 점을 문서 편집 기능을 사용해 바로바로 눈으로 볼 수 있게 알려오면서 우려했던 비대면 사각지대가 사라졌다는 평가다.

팀원인 김 부장은 “흔히 리더로는 ‘똑게(똑똑하게 게으른 사람)’가 좋다고 하는데 이렇게 경험해 보지 않은 비상 시국엔 오히려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가 더 효율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지시 없이 ‘알아서 잘 해라’고 하는 상사보다는 일을 정리해 주고 경영진에서 내려온 지침을 그때그때 알려주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시기인 것 같다”고 했다.

 재택근무 중인 기업 리더가 직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대한 깨알같은 피드백(오른쪽 붉은 부분)을 빨간 펜으로 지시한 모습. [사진 독자 제공]

재택근무 중인 기업 리더가 직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대한 깨알같은 피드백(오른쪽 붉은 부분)을 빨간 펜으로 지시한 모습. [사진 독자 제공]

재택근무 상황에서 실무형으로 변신한 리더들도 많다. 국내 정보기술통신(ICT) 기업에 다니는 C 팀장의 경우 평소엔 팀원들을 불러 수시로 구두 보고를 받는 스타일이었지만 재택근무 이후 본인이 많은 일을 직접 처리하고 있다. 그는 “이런 비상 시기엔 무조건 팀원들한테 뭘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팀장이 먼저 업무를 자세히 파악하고 역할과 책임(R&R)을 명확히 해 줘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내 게시판을 통해 업무 지시를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팀원들에게 재택근무 장·단점을 취합해 불편 사항을 경영진에게 보고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한 팀원은 “재택근무 이후 오히려 팀장님이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해주니 우리도 알아서 거기에 맞춰 업무를 하고 있다”며 “이렇게라면 재택근무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③‘도우미’사라지자 당황형

재택근무로 인해 문서 공유 프로그램, 그룹통화, 화상회의 프로그램 등이 업무의 핵심 수단이 되면서 디지털 소프트웨어에 익숙치 않은 리더들은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히게 됐다. 메신저로 일반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클라우드 기반 프로그램을 통해 문서를 작성·편집·공유하거나, 구글 ‘행아웃’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스카이프’, ‘팀즈’ 등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원만히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화상회의와 업무 공유 기능 등을 지원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팀즈' 화상회의 모습. [사진 마이크로소프트]

화상회의와 업무 공유 기능 등을 지원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팀즈' 화상회의 모습. [사진 마이크로소프트]

중견그룹 D 차장은 “평소 수기 결제와 대면 보고, 인쇄된 보고서에만 익숙한 부장 이상 임원급들은 직원들이 갑자기 원격근무를 시작하니 디지털 소외자가 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원격근무 초반 개인 노트북 PC의 속도가 느려 일 처리에 불편이 있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버전으로 바꿔 업무를 봤다. 그런데 부장은 방법을 몰라 직원들이 부장에게 사용법을 설명하느라 반나절을 쓰기도 했다.

D 차장은 “평상시엔 옆에 똘똘한 부하가 다 직접 도와드리고 설명해줬는데, 그게 여의치 않으니 일일이 전화하거나 짜증을 내고 심지어 일부 직원은 다시 사무실로 출근하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인사 분야 전문가인 김이경 ㈜LG 전무는 “위기 상황에는 리더 개인의 자질보다는 회사 차원의 지침이나 업무환경에 따라 기업이 운영되는 게 더 바람직하다”며 “재택근무하기 좋은 정보기술(IT) 인프라와 조직 문화를 갖추고 전 구성원을 상대로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무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콘퍼런스콜, 화상회의 등 같은 장소에 모이지 않고 진행하는 ‘버츄얼 미팅(Virtual meeting)’이 늘어나고, 일하는 방식의 유연성은 확실히 높아질 것”이라며 “조직 리더도 근태관리가 아닌 성과관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소아·강기헌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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