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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임박한 재앙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 모욕은 곤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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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혼돈의 시대에 놓친 헌법적 가치들 

신천지 교인들의 코로나 집단 감염을 둘러싼 사회적 비난이 시작될 때 한 판사가 장문의 의견을 전달해왔다. 그는 “대부분의 법조인과 법률학자들이 눈을 감고 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갈 사안이라 생각해 사견(私見)을 전제로 글을 보낸다”고 밝혔다. 불교 신자인 그는 법원장을 지낸 뒤 고법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소수자 ‘왕따’ 민주국가 도리 아냐 #전체주의 발상의 기본권 제약 안돼 #측은지심으로 피해자들 돌봐주고 #근거없는 정치적 낙관론 경계해야

‘난세에 원칙과 소수자의 인권을 생각해 본다’는 글에서 이 판사는 “그 어떤 종교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국민의 일원이고, 기본권은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소수자라고 다수자의 이익 확보 차원에서 함부로 이들을 짓밟고 ‘왕따’시키는 것은 법치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국가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라는 이유로 성폭행 사범처럼 모든 동선이 공개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교과서적 예시처럼 열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두명의 사람들은 희생이 되어도 괜찮다는 것일까. 이준석 미래통합당 최고위원의 주장대로 비확진자가 확진자에 비해 우월하고,확진자의 기본권을 제약해도 괜찮다는 것은 무서운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이런 비주류적인 의문들은 우리의 헌법 가치를 고려할 때 충분히 논의돼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 소수파 의견이다.

헌법(10조)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이에 근거해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녀야 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홍역 백신주사 접종에 대한 유대교의 반발을 놓고 헌법적 논란이 일었던 것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줘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종교 집회의 전면 금지를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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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의 판사는 “때문에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는 공권력의 작용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특정 종교를 겨냥해서 국가 권력이 예배를 금지하거나 예배 장소를 막무가내식으로 폐쇄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종교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긴급 명령을 검토중”이라고 밝히자 진중권 전 교수가 “정치 말고 방역부터 하라”고 힐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편지를 보낸 판사의 주장처럼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한 집단을 손가락질 해 희생양을 만들면 정치공학적으로는 포퓰리즘 세태에 부합할지 모르나 자유 공화주의 체제의 소수자 인권 보호 측면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국가나 집단,개인들은 위급할 때 일수록 기본이 무엇이고,어떻게 원칙을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고심의 과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박형준 교수는 “국가기관들은 신천지 신도들에 대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바라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박원순 서울시장 "신천지 이만희 회장 등을 살인 혐의로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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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법무부장관 등 국무위원과 각 지방자치단체장들은 헌법의 의무를 다했는가. 자신들의 임무는 등한시 한 채 사태수습에만 급급해 마녀사냥식으로 확진자들을 윽박지르지는 않았는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헌법 조항(7조)은 선언적 의미에 불과해졌다. 헌법이 규정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코로나 국면이란 혼란기를 이유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적어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우리는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과는 달라야 한다. 기본권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인권 감수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일부 법조인들의 주장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 "중국 봉쇄보다 신천지 봉쇄가 가장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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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들을 탓하기에 앞서 대통령은 헌법의 가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의 생명권을 보호하라는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권한을 남용해 국민 주권주의와 법치국가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는지 등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4·15 총선을 염두에 두고 국민의 건강권을 담보로 정치적 행위에 함몰됐다면 이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 재판관 출신은 “통치권자의 거짓말은 국가와 국민을 위험을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탄핵사유가 된다”고 밝혔다.

추미애 법무부장관 "검찰에 신천지에 대한 조속한 압수수색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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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어떤가. 신천지에 대한 압수수색을 놓고 검찰과 힘겨루기를 했던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출입국관리 업무를 관장하는 법무부장관이 국민의 생명권을 위해 어떤 대안를 마련했는 지를 주권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추 장관의 ‘물러서지 않는 독선’은 권력을 향한 야욕과 술수로 오버랩 된다. 그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는 검찰 내부의 시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조계의 분석처럼 코로나 확산에 대한 책임을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씌워 총선 뒤 불가피한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수사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번 사태를 뒤집어 보면 신천지 신도들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피해자가 됐다. 가족과 함께 동남아에 머물던 사람들은 비행기 편이 끊겨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고,작은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계약취소로 생계가 위태로워졌다.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자부심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친정부 세력들은 “코로나 사태는 대구사태이자 신천지 사태” “대구는 통합당 지역이니 손절해도 된다”는 등의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소수자 인권보호,공정과 정의를 외치던 시민단체와 친여 성향의 언론매체들은 이와 관련한 어떤 논평하나 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들의 의식 속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정보장,질서 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는 조항(37조)이 어른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이 정부 들어 정치적 의사 결정은 청와대와 친여권 세력이 독점했다. 공적이고 민주적 기관이어야 할 정부 조직은 물론 교육계와 노동계에 이어 심지어 종교계까지 특정집단의 사유물로 삼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자못 의심스럽다. 국가와 정치체제의 뼈대인 헌법적 가치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근거없는 낙관론으로 ‘코로나 쇼’를 계속하려는가. 임박한 재앙이라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모욕해선 안될 일이다.

아전인수격 여론조사는 체제 위협으로 수사 대상

“신천지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을 놓고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압수수색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코로나 방역활동을 위해 신도들의 명단을 강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검찰이 나설 경우 신천지 신도들이 오히려 숨을 가능성이 크고,이는 방역활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86%가 신천지 압수수색에 찬성을 했다는 여론조사의 설문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이었다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법조계,특히 검찰 구성원들은 이 정부가 국정의 지표로 삼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에 많은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더욱이 4·15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기관들이 정치적 편향성에 근거해 아전인수격의 조사 결과를 내놓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검찰은 여론조사 기관들의 표본 수집 방법과 조사 진행 방식에서의 문제점이 있었는지, 이 과정에 정치권과의 묵시적 결탁 등 불법 행위가 있었는지에 대해 수사를 벌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민의(民意)의 왜곡은 주권자들은 물론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을 넘어 위협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부정한 여론조사는 공직선거법은 물론 업무방해 등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