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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풀 포기 하나에도…산막의 무경계적 가르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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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50)

사람이 제대로 세상을 살고 제대로 나이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척도가 있겠으나 내 보기에 그것은 온고지신(溫故而知新)을 통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다. 아니라면 살아온 세월이 무슨 의미겠으며, 살아갈 날은 또 무슨 대수겠는가? 나라가 혼란스럽고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제대로 나이 든 사람은 제대로 걸어야 한다. 우리의 걸음걸이 하나가 마침내 후세의 길이 되리니.

코로나로 일상이 많이 꼬인다. 모임은 취소되고, 사람들은 저상되고 우울해진다. 주말 눈 소식이 그나마 기쁨을 준다. 일상으로 돌아가자.

내일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오늘의 설경을 즐기리라. [사진 권대욱]

내일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오늘의 설경을 즐기리라. [사진 권대욱]

며칠간의 출장 여독인가 오전 내내 잠만 잤다. 물 좋고 공기 좋고 햇살 좋은 이곳. 산막에선 움직이는 게 예의라, 3월 1일을 장 담그는 날로 잡고 준비한다. 그간은 어머니 덕으로 걱정 안 하고 살았으나 이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항아리를 깨끗이 씻고 천일염 소금물을 만든다. 오래전부터 간수 빼고 보관해 두었으니 소금은 됐고, 물 또한 걱정 없다. 염도가 중요하므로 계란을 띄워본다. 500원 동전만큼 떠오르면 제대로 된 거다. 눈은 펑펑 내리고 난롯불 좋은 산막. 내일모레 장을 담근다.

눈 내리고 바람 부는 밤을 보았다. 불을 밝히고 침대에 누워 펄펄 흩날리는 눈을 보며 참 잘 왔구나 싶어 좋았다. 잘 잤다. 새벽 눈길을 걸으며 눈을 듣고 겨울 숲을 읊었다. 하얀 눈 곱게 쌓인 산길을 걸으며 세상 이 노래에 가장 어울리는 길이구나, 침잠할 일이구나 느꼈다. 마른 골짜기 그 깊은 속을 흘러가는 물길처럼, 발자국에 밟히며 깊어지는 낙엽처럼, 세상의 푸른 욕망 모두 거두어 버리고, 혈혈단신(孑孑單身) 외진 길을 걸어봐야겠다 생각했다. 걸으며 깊이 그 어딘가 숨어있는 본디 내 근원이던 순백의 영혼을 찾아 헤매어 봐야겠다 다짐했다.

살다 보면 이런 날이 있다. 큰 한파가 온다 하고, 눈이 온다 하고, 정리할 일도 좀 있고, 그래서 밤을 도와 왔다. 곡우마저 없는 완벽한 고독과 준엄한 자유.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듣고 싶으면 듣고 보고 싶으면 보는 오늘, 이런 날이 그리 흔하겠나? 3년을 홀로 보냈던 곳,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안도한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한다.

많은 글을 썼고 이곳 저곳 강연도 꽤 다녔으며, 노래도 많이 불렀고 또 부를 것이니 제법 충실한 듯하다.

많은 글을 썼고 이곳 저곳 강연도 꽤 다녔으며, 노래도 많이 불렀고 또 부를 것이니 제법 충실한 듯하다.

‘쓰·말·노’의 삶을 산지도 꽤 오래되었다.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그 앞과 뒤와 그 위와 아래,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나의 일은 너무도 엄중히 자리 잡고 있다 믿고 행하니 무경계적 삶 또한 충일하지 않다 말 못하겠다.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이 이다지 시리고 허전함은 웬일인가? 무언가 얽매인 듯하고 자재롭지 못하다 느껴지는 건 왜일까?

따져 물어가니 단 하나의 원인이 있었다. 무경계라 믿었지만 경계가 있었고, 자재라 믿었지만 자재롭지 못했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조직과 시스템, 그리고 사람이라 여겨 그것만 초월하면 자유자재의 높푸른 이상이 끝없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원인은 다름아닌 나 자신에게 있더라. 어쭙잖은 허명, 몇 푼의 돈과 명예, 이런 것이 나를 묶고 있더라.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아직도 못 끊는… 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과 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는 아직도 멀었는가? 새벽길 붉은 여명이 참 곱기도 하구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같지 않더라)’는 오랑캐 땅에는 화초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더라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모두 경국지색을 일컫는 고사에서 연유한다. 눈이 많이 오니 걱정도 되지만, 생각하면 고마운 눈이다. 그냥 왔다 가는 강우와 달리 이 눈은 곱게 쌓여 오는 봄 햇살에 조금씩 조금씩 물을 머금고 뿜어 대지를 적시고 계곡을 흐른다. 봄 내내 잠든 대지를 깨우고 생명을 틔울 것이다. 나는 눈 쌓인 계곡길, 오는 봄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리라.

글 한줄 읽고 먼산 바라보고 눈 감고 한식경을 생각하노니, 산기운 날 저물며 더욱 아름답고 새들은 집 찾아 돌아오는데 그 감흥 말하려 하나 이미 할 말을 잊었도다.

글 한줄 읽고 먼산 바라보고 눈 감고 한식경을 생각하노니, 산기운 날 저물며 더욱 아름답고 새들은 집 찾아 돌아오는데 그 감흥 말하려 하나 이미 할 말을 잊었도다.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국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하얀 산길을 헤매고 싶소. 저 멀리 숲 사이로 내 마음 달려가나 아 겨울새 보이지 않고 흰 여운만 남아있다오. 눈 감고 들어보리라 끝없는 님의 노래여, 나 어느새 흰 눈 되어 산길 걸어간다오.’

산막은 많은 것을 가르친다. 장작 난로 하나에도, 풀 포기 하나, 나무 그루 하나에도 가르침은 있다. 밑불이 충실하면 커다란 통나무도 활활 탄다. 조직도 같다. 열정의 밑불이 살아 있을 때 통나무와 같은 화두조차도 활활 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인들 그렇지 않겠나.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나? 그 밑불이 꺼지지 않나 늘 깨어 있고 혹이라도 염려되면 “보아라,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타고 있지 않으냐”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 외에….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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