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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집창촌인데 '시민명소'···눈이 휘둥그레지는 전주 선미촌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8일 전북 전주시 노송동 선미촌 내 노송늬우스박물관. 김준희 기자

지난달 28일 전북 전주시 노송동 선미촌 내 노송늬우스박물관. 김준희 기자

도심 한복판에 성매매 집결지가 있다. 밤마다 홍등(紅燈)이 켜지는 이곳에 박물관이 생겼다. 박물관은 과거 성매매 업소였다.

선미촌에 '노송늬우스박물관' 개관 #옛 성매매업소 복합문화공간 꾸며 #노송동 역사, 주민 삶 깃든 자료 가득 #쪽방 13개마다 설치미술·펜화 등 전시 #김승수 시장 "마을 재생 이끌 거점공간"

전북 전주의 대표적인 홍등가인 선미촌에 지난 1월 31일 문을 연 '노송늬우스박물관' 이야기다. 전주시가 옛 성매매 업소를 건물주에게 빌려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이곳은 노송동의 굴곡진 역사와 주민 애환이 담긴 작품과 자료로 채워졌다. 과거보다 성매매 업소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밤에는 불야성을 이루는 집창촌에 웬 박물관일까.

노송늬우스박물관 2층. 성매매를 하던 쪽방 13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갤러리로 변신했다. 김준희 기자

노송늬우스박물관 2층. 성매매를 하던 쪽방 13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갤러리로 변신했다. 김준희 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노송늬우스박물관. 주변 성매매 업소는 대부분 영업 전이라 커튼으로 가려져 있거나 텅 비어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전주시 서노송예술촌팀이 근무하는 '현장시청'이 있었다. 성매매 업소 집결지로 알려진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탓인지 낮인데도 거리는 한산했다.

박물관에도 관람객이 드물었다. 유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름한 겉모습과 달리 파격적인 예술 작품과 노송동 역사와 주민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가득했다.

마스크를 쓴 관람객이 노송늬우스박물관 1층 노송동 주민 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를 둘러보고 있다. 김준희 기자

정인수 작가가 노송동 골목길을 스케치한 펜화. 김준희 기자

안내판에는 "노송늬우스박물관은 노송동의 이야기를 콘텐트로 재생한 마을사 박물관이다. 선미촌이라는 성매매 집결지가 문화·예술을 통한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되길 바라며 박물관 개관을 추진했다"고 적혀 있었다.

1층은 주민 전용 갤러리였다. 성매매 업소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부터 드라이플라워·초상화·수석 등 아마추어 예술가인 주민들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가니 쪽방 13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성매매 공간이 특색 있는 갤러리가 됐다.

노송늬우스박물관 1층 갤러리에 걸린 사진. 옛 성매매 업소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과정이 담겼다. 김준희 기자

노송다큐21 방에 걸린 사진. 1983년 12월 전주시청 청사 준공식 모습. 김준희 기자
신석정 시인을 기리는 방. 김준희 기자

작가들은 저마다 보고 느낀 선미촌과 노송동에 대한 감상을 설치미술·펜화·조각·영상미술 등으로 표현했다. 강현덕 작가는 이 지역 흔적이 담긴 유리 조각과 장난감 등 쓰레기 200개를 주워 직육면체 아크릴 상자에 담아 '21900번째의 빛'을 선보였다.

정인수 작가의 작품 방에는 그가 노송동 골목길을 누비며 펜으로 스케치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정 작가는 김장을 준비하는 아줌마부터 화분에 심어 놓은 파까지 이 마을 일상과 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한국 서정시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신석정 시인 방'도 있다. 신석정 시인이 전주제일고(옛 전주상고) 교사 재직 시절 살던 노송동 집 '비사벌초사'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강현덕 작가의 작품 '21900번째의 빛'. 노송동의 흔적이 담긴 유리 조각과 장난감 등 쓰레기 200개를 주워 직육면체 아크릴 상자에 담았다. 김준희 기자

강현덕 작가의 작품 '21900번째의 빛'. 노송동의 흔적이 담긴 유리 조각과 장난감 등 쓰레기 200개를 주워 직육면체 아크릴 상자에 담았다. 김준희 기자

일제 강점기부터 지난해까지 노송동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고 사진을 전시한 '노송다큐21'과 노송동 주민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 마을신문으로 꾸민 '노송늬우스 방'은 노송동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전주동초등학교 재학생 234명이 바라보는 노송동을 감상할 수 있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우리 마을'도 볼거리다. 학생들의 그림을 레이저를 이용해 목판에 재연했다.

노송늬우스박물관은 전주시가 추진하는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이 프로젝트는 올해 말까지 국비 등 74억원을 들여 선미촌 일원(2만2760㎡)을 문화·예술인들이 창작 활동을 하고 시민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으로 바꾸는 문화재생사업이다.

정하영 작가의 작품 '아름답고 충실한 지층_빠르게 혹은 느리게'. 붉은 색 웨딩드레스를 입힌 마네킹과 육각형 거울 등을 이용해 선미촌 여성의 삶을 표현했다. 김준희 기자

정하영 작가의 작품 '아름답고 충실한 지층_빠르게 혹은 느리게'. 붉은 색 웨딩드레스를 입힌 마네킹과 육각형 거울 등을 이용해 선미촌 여성의 삶을 표현했다. 김준희 기자

성매매 업소를 일방적으로 내쫒는 '불도저 방식'이 아니라 주변 환경부터 매력적인 공간으로 가꿔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하는 일종의 '햇볕 정책'이라는 게 전주시 설명이다. 지난해 1월 임주아 시인 등 예술가 7명으로 구성된 '물왕멀팀'이 의기투합해 선미촌에 서점 '물결서사'를 연 게 대표적이다. 프로젝트 추진 이후 2016년 8월 기준 성매매 업소 49곳, 성매매 여성 80여 명이 3년 만에 3분의 1로 줄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노송늬우스박물관은 주민 힘으로 마을 재생을 이끌어 갈 거점 공간"이라며 "전주시는 선미촌을 가장 특색 있는 인권과 예술 공간으로 살려내겠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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