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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이 정도 거리 두면 대만은 언젠가 우리 품으로 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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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6〉 

랑징산은(왼쪽 둘째) 화가 장다첸(張大千·오른쪽 첫째)과 죽이 잘 맞았다. 장다첸을 소재로 명작을 많이 남겼다. 1995년 10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랑징산은(왼쪽 둘째) 화가 장다첸(張大千·오른쪽 첫째)과 죽이 잘 맞았다. 장다첸을 소재로 명작을 많이 남겼다. 1995년 10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중공은 평화를 노래하며 비 당원과 반대파를 동조자로 만들었다. 대상은 화교와 학자, 연예인, 예술가, 군인, 언론인 등 다양했다. 집권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1955년 5월,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포문을 열었다. “대만 문제는 전쟁과 평화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중국 인민은 조건만 갖춰지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원한다.” 마오쩌둥은 원칙만 강조했다. “평화는 고귀한 것이다. 애국이 제일이다. 애국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자.” 실현 불가능한 이유도 댔다. “외국 세력의 간여로 실천에 옮기지 못해 유감이다.” 외세는 미국을 의미했다.

기상천외한 ‘일국양제’ 제도 내놔 #보수파·외교부 반대 목소리 잠재워 #“대만의 NGO 참여는 상관 없지만 #두 개의 중국 바탕 깐 행동은 곤란” #홍콩을 일국양제의 시험구로 삼아 #신화사 분사, 대만 인사 접촉 창구

유엔서 대만 쫓겨나며 양안 관계 급변

천샹메이는 타고난 로비스트였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 백악관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사진 김명호]

천샹메이는 타고난 로비스트였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 백악관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사진 김명호]

1972년, 양안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대만의 자유중국이 유엔에서 쫓겨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법통을 계승했다. 7년 후 미국과 수교하자 대세가 대륙 쪽으로 기울었다. 대만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국가로 변했다.

덩샤오핑은 한 나라에 2개의 제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기상천외한 제도를 제창했다. 덩샤오핑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국제조직에 양안이 참여할 경우 대륙의 기본입장도 밝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한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다. 단, 현재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한다. 대만이 독립적으로 비정부기구(NGO)나 준 정부기구(SGO)에 참여하는 것은 상관없다. 단, 두 개의 중국을 바탕에 깔고 하는 행동은 곤란하다. 우리는 대만의 현실과 각계 인사의 의견을 존중한다. 합리적인 정책과 방법을 제시하면 수용하겠다.” 통전을 염두에 둔 내용이었지만 중공 내부에선 불만이 많았다. 보수파와 외교부는 대놓고 반대했다. 덩샤오핑의 한마디에 수그러들었다. “이 정도 거리를 두면, 대만은 언젠가 우리 품에 들어온다.”

홍콩은 일국양제의 시험구(試驗區)였다. 신화통신 홍콩분사는 대만 칭화대학 총장 선쥔산(沈君山·심군산)과 싱타오르바오(星島日報) 대주주 후셴(胡仙·호선), 세계적인 사진가 랑징산(郞靜山·낭정산), 장저(江浙·강소절강)동향회 종신명예회장 쉬지량(徐季良·서계량)과 접촉을 시도했다.

쉬지량은 80을 넘긴 노인이었다. 분사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과 부사장들이 편지를 보냈다.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쉬지량은 건강을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부회장들이 분사 사장과 부사장들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부회장들은 고향 얘기만 했다. 양안 관계는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통전 실패였다.

동남아 언론계의 여왕 후셴은 때가 되지 않았다며 쉬자툰의 손을 여러 번 뿌리쳤다. 1993년 대륙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동남아 언론계의 여왕 후셴은 때가 되지 않았다며 쉬자툰의 손을 여러 번 뿌리쳤다. 1993년 대륙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랑징산은 명 사진가였다. 1930년대부터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했다. 중국의 산수를 담은 작품은 모두 명품이었다. 102살 때 홍콩을 찾았다. 쉬자툰에게 황산(黃山) 여행을 간청했다. 랑진산은 쉬자툰의 배려로 황산을 누볐다. 밥도 젊은 사람보다 많이 먹고 온종일 산을 누벼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대륙에서 열린 사진전에 온 중국이 떠들썩했다.

후셴은 우리가 ‘호랑이 연고’라 부르는 虎標萬金油(호표만금유) 설립자 후원후(胡文虎·호문호)의 상속자였다. 쉬자툰의 초청을 받을때마다 “고맙다”는 말만 전할 뿐 응하지는 않았다. 10월 1일 건국기념일 연회 초청장을 받자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추하게 늙은 과부가 어찌 감히 대인(大人)을 뵙겠습니까.”

네웨이핑(聶衛平·왼쪽 둘째)과 진융(오른쪽 둘째)의 대국을 참관하는 선쥔산(왼쪽 셋째). 서있는 여자는 대만 여배우 후인멍(胡因夢).1984년 홍콩 진융 자택. [사진 김명호]

네웨이핑(聶衛平·왼쪽 둘째)과 진융(오른쪽 둘째)의 대국을 참관하는 선쥔산(왼쪽 셋째). 서있는 여자는 대만 여배우 후인멍(胡因夢).1984년 홍콩 진융 자택. [사진 김명호]

전 광둥(廣東)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리추원(李儲文·이저문)이 구술을 남겼다. “당시 나는 신화통신 홍콩분사 부사장이었다. 외부 업무를 주로 봤다.

쉬자툰은 후셴의 행동에 국·공 양당의 간극(間隙)을 실감했다. 후셴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항일전쟁 시절 국민당 측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한, 화교 거상의 딸답다며 높이 평가했다. 통전이 실전보다 더 힘들다는 말도 했다. 후셴은 자신이 운영하던 신문사 창간기념일 만찬에 우리를 초청했다. 문전에서 우리와 인사만 나눴다. 말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천샹메이(陳香梅·진향매)는 국민당 공군을 창설한 미 퇴역장군 셔놀트(Claire Lee Chennault)의 부인이었다. 미국 상원과 하원에 인맥이 단단했다.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대통령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워싱턴의 여왕벌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복잡하고 요란한 여자였다. 미국에 살며 대만과 대륙을 부지런히 오갔다.

위기 땐 친구도 내치는 관리와 정치가

홍콩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 선거결과 보도를 보고 즐거워하는 리추원. 1996년 12월 홍콩. [사진 김명호]

홍콩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 선거결과 보도를 보고 즐거워하는 리추원. 1996년 12월 홍콩. [사진 김명호]

쉬자툰의 회고를 소개한다. “천샹메이가 베이징 외교부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는 천 여사가 홍콩에 오면 저녁을 함께했다. 나를 만나는 이유가 자신의 지명도를 확대 시키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서 만나지 말라는 말을 자주했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결국 일이 터졌다. 금은방을 하는 여동생이 나이트클럽을 시작했다며 개업식 테이프 커팅을 부탁했다. 전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의 처남이 수락했다는 말을 듣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개업식 날 아침 갑자기 일이 생겼다. 부사장 리추원에게 대신 가라고 했다. 홍콩 언론이 난리가 났다. 신화사 부사장의 나이트클럽 개막식 참석을 대서특필하며 일국양제까지 비판했다.”

대국의 고위 관리와 정치가들은 공통점이 있다. 좋을 때는 좋다가 위기에 몰리면 친구건 뭐건 국물도 없다. 말도 잘 뒤집고 핑계거리도 잘 찾아낸다. 어느 나라건 비슷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은 좀 심한 편이다. 나이트클럽 개막식 사건을 계기로 쉬자툰은 곤경에 처했다. 리추원을 속죄양으로 만들었다.

선쥔산은 가장 중요한 통전대상이었다. 쉬자툰은 무협소설가 진융(金鏞·김용)을 중간에 넣었다. 세 사람은 바둑에 조예가 깊었다. 대만 4공자(公子)의 한 사람인 선쥔산의 바둑 실력은 국수급 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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