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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드라마로 환생? 이태원에 나타난 이 시대의 홍길동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54)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옵고...” 우리 고전소설 대사 중 이것만큼 유명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아버지는 지체 높은 양반이지만 어머니가 천한 시비(侍婢)라 양반 자제이되 양반이 될 수 없었던 자의 한 서린 그 말. 동사무소 서류 양식에, 이름을 적어야 하는 어느 곳이든 예시로 늘 적혀 있는 그 이름. 그만큼 친숙한 인물 홍길동의 대사다.

우리는 홍길동을 여기까지만 아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나아가 봐야 의적(義賊) 활동을 한 것, 그 도적 무리의 이름이 활빈당(活貧黨)인 것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나아가면 도술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 그리고 율도국이라는 가상의 신세계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 여기에 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가상 국가나 세운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한계를 드러냈다고 비판하면서 좀 더 아는 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홍길동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의 작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고 허균이 아니라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최초의 한글소설이 아니라는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

우리가 아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떠돌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누군가 소설로 엮어낸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사진 드라마 '홍길동' 포스터]

우리가 아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떠돌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누군가 소설로 엮어낸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사진 드라마 '홍길동' 포스터]

400년 전에 쓰인 한문소설 『노혁전』이 『홍길동전』과 같은 내용이라고 한다. 그 주인공도 홍길동인데, 어머니 신분이 미천하고 도둑의 우두머리이며, 조정에서는 상금을 걸고 추적했지만 그를 잡지 못하였다는 점도 우리가 아는 그 홍길동과 같다. 『노혁전』의 주인공은 40년간 도둑들을 이끌다가 무리를 해산하고 결혼을 해서는 자식을 많이 낳고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을 전한 황일호는 “도적의 꾀를 내다가 늘그막에 깨달아 본연의 선함으로 돌아오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 같으니, 이는 호걸의 일”이라고 찬했다고 한다.

400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속의 도술이나 율도국 같은 설정은 소설 양식으로 발전하면서 후대에 가미된 요소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떠돌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누군가 소설로 엮어낸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점들에 대해서 환상적이라거나 현실을 타파하는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비판, 심지어 비난한다면 홍길동은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하던 양반집 서자 아들의 한만 기억해서는 홍길동을 알 수가 없다. 탐관오리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의적 활동과 그 이후의 율도국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자. 자신의 출신으로 인해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여기에 좌절하기보다 더욱 이를 악물고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아 세상에서 힘을 펼쳐 보인 걸출한 영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도술, 신통력은 지금의 슈퍼히어로나 뱀파이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슈퍼히어로들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세력을 규합하여 ‘어벤저스’ 군단을 이루어내듯, 홍길동은 바윗돌을 들어 올리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힘을 확인시키고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 무리를 이끌고 의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도술 능력이 뛰어난 것뿐만이 아니라 그 집단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해 하나의 힘을 낼 수 있는 집단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한몫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맹(孔孟)을 본받지 못하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다면 어찌 사내대장부라 하리오”했던 홍길동은 그만큼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래서 서자라 과거시험도 볼 수 없었던 현실을 탓하기보다 혼자 힘으로라도 꾸준히 도술을 연마하여 내공을 쌓았다. 결국 그의 존재를 견제했던 홍판서의 첩 초란이 자객을 보냈을 때 일진광풍(一陣狂風) 휘몰아치며 제거하고, 드디어 세상에 떨쳐 나갔다. 이때 홍판서 앞에 꿇어 엎드려 인사하며 하는 말이 그 유명한 ‘호부호형(呼父呼兄)’ 운운하는 대사다.

세상에 나간 홍길동은 활빈당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다 조정에서 형까지 내세우며 회유하자 제 발로 임금 앞에 나타났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는 임금에게 홍길동은 ‘병조판서’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임금이 그러마 하자 그날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성도라는 섬에서 괴물에게 붙잡혀 있던 처녀 셋을 구해 부인으로 삼은 뒤 무리 삼천을 이끌고 성도에 정착했다.

성도 근처 율도국이라는 나라의 임금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율도국을 정벌한 뒤 나라의 왕이 되어 다스렸다. 그런데 이때 홍길동은 자신의 무리에게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 주고,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율도국의 백성들에게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약속한 뒤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홍길동의 성공에는 자신의 한을 풀어낸 것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와준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 훌륭하게 다스려내었다는 것을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한 장면. 주인공은 재벌의 갑질로 표현되는 세상의 억압에 당차게 맞서는 꿋꿋한 청년이다.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한 장면. 주인공은 재벌의 갑질로 표현되는 세상의 억압에 당차게 맞서는 꿋꿋한 청년이다.

요새 재미나게 보고 있는 드라마에서 그 주인공이 마치 홍길동과도 같아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재벌의 갑질로 표현되는 세상의 억압에 당차게 맞서는 꿋꿋한 청년이다. 이 이야기는 캔디형 성공스토리에 복수 스토리가 결합한 흔한 서사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독특하고 매력 있다.

이 청년은 작은 포차로 시작해 요식업계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지금 가게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마치 홍길동의 분신인 듯 재벌2세 서자, 멘사 회원이면서 지원한 모든 대학에 합격하고도 대학에 가지 않고 주인공에게 인생을 건 소시오패스, 조폭 출신 전과자, MtF트랜스젠더, 영어를 할 줄 모르고 한국 국적도 아직 취득하지 못한 흑인 등이다. 그러고 보니 1890년대부터 1904년까지 활동했던 역사 속에 실존 집단 ‘활빈당’도 동학농민운동군과 의병들로서 농민, 장사꾼(보부상), 승려, 머슴, 거지, 병정, 포수, 관노, 훈장, 의사, 광산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당장 가게의 수익을 올리는 것보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이들을 지키는 일에 더욱 집중한다. 못 하는 게 있으면 더 잘할 수 있게 격려해 주고, 편견 때문에 아파하는 이가 있으면 거기에 맞서 싸워 자기 사람을 지켜낸다. 십오 년짜리 계획이 있으며, 할 수 있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자기 사람들과 함께 똘똘 뭉친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복수와 성공 둘 다 멋지게 이루겠는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이 시대의 가치관이 곧 홍길동전의 서사와도 맥락이 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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