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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국민의 피·땀·눈물, 대통령의 무한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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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님,

바이러스의 포로가 된 도시와 삶 #경제는 쑥대밭, 국제적 고립 우려 #신천지 탓 정부 탓 싸울 때 아니고 #대통령이 무한책임 지고 극복해야

바이러스는 도시의 공기를 장악했고 코로나는 우리 삶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세균은 침대와 식탁, 거리와 일터에서 내 목숨을 노립니다. 이웃과 벗은 서로 기피하는 잠재적 보균자가 됐습니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하는 순간이 올까 조마조마합니다. 달랑 마스크 한 장에 자신의 운명을 의지한 채 바이러스에게 나만은 제발 봐달라고 애원하는 기막힌 현실입니다.

눈 뜨면 수 백명씩 늘어나는 환자 숫자에 기겁하며 째깍째깍 시간 가는 게 두렵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사스(중증호흡기증후군·SARS)의 재생산지수(R0)는 2~5였습니다. 환자 1명이 2~5명을 감염한다는 뜻이지요. 2002년 11월 발병한 사스는 9개월 동안 37개국에서 8000여 명에게 병을 옮겼고, 774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경우, 이미 80여 개국에서 확진자 10만 명에 이르고 3300여 명의 숨을 거둬갈 정도로 더 강력합니다. 코로나의 전파력(R0)이 사스에 맞먹는다고 단순 비교할 때, 방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국내 확진자 5000명은 1만 명~2만5000명으로 폭증하고, 다시 2만 명~10만 명, 4만~20만 명….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잘 대처하고 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은 한가합니다.

판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의 공포가 몰아치는데 “곧 종식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은 재앙을 초대하는 오만입니다. 16세기 초 스페인 침략자들이 전파한 천연두·인플루엔자 등 전염병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아즈텍·잉카 문명이 멸망했다는 책 『총, 균, 쇠』의 분석이 남 일 같지 않습니다. 5000만 명~1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의 악몽을 다룬 다큐멘터리 ‘판데믹-인플루엔자와의 전쟁’을 숨죽여 보면서 우리가 그 꼴이 나지 않을까 오싹합니다.

세계 9위 무역대국 한국이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있습니다. 유엔회원국 193개국 중 절반 이상이 우리를 병균 취급하며 빗장을 걸고, 해외에선 국제노숙자의 수모를 당합니다. 이제 동맹 미국마저 우리를 외면하게 되면 프랑스·독일 등 유럽 주요국으로 ‘코리아 포비아’가 퍼질 겁니다. 자발적으로 국경 봉쇄를 선언하라는 국제적 압박이 어른거립니다.

대통령님이 말한 ‘한·중 운명공동체’가 이런 건지 실망스럽습니다. “중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이라며 배려했지만 중국은 우리를 버립니다. ‘상반기 중 제발 한 번 한국에 다녀가시라’며 비위를 맞췄건만 “모든 한국발 입국자를 격리해야 한다”는 야박한 답만 돌아옵니다. 시진핑 주석이 바이러스 발원지를 찾으라고 지시 내렸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행여 우한 폐렴이 ‘대구 폐렴’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코리아 바이러스’로 둔갑하는 공정(工程)이 걱정됩니다.

경제는 쑥대밭입니다. 불행은 약자부터 덮칩니다. “경기가 거지 같다”는 시장 상인의 하소연은 괜한 푸념이 아닙니다. 길거리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보십시오. 감원·폐업·도산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입니다. 임시직·일용직은 벌써 휘청대고, 어제까지 멀쩡하던 식당·숙박업소의 자영업자들은 속속 문을 닫고 생업을 포기합니다. 회사원들은 연월차에 유급·무급 휴가를 다 쓰고 나서 해고통지서가 날아올까 떨고 있더군요. IMF 경제위기 때보다 더 차가운 위기감이 엄습합니다.

모든 게 혼란스럽습니다. 코로나의 습격 앞에서 속수무책의 외교, 소득주도성장이고 뭐고 엉망이 된 경제, 30대 처자에게 ‘겁먹은 개’ 소리나 듣는 대북 정책, 진영과 대결에 눈먼 사회, 바이러스와 동거하는 ‘저녁 있는 삶’….

512조원의 예산과 11조원의 추경을 갖고도 마스크 하나 해결 못 하고, “코로나 확산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 때문”이라며 코로나 공정에 면죄부를 깔아주고, 외국인 출입국 관리의 책임자가 ‘신천지 때려잡기’에만 매달리는 그런 장관들에게 존재 이유를 묻습니다. 국민이 하나둘 시름시름 앓고 나자빠지는데 자기 면피와 자국민을 ‘살인자 집단’으로 매도하는 마녀사냥에 혈안입니다. 코로나보다 더 고약한 분열과 증오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무리를 내치셔야 합니다.

대통령은 국정에 무한책임을 집니다. ‘극성 신천지 탓’ ‘싸돌아다닌 국민 탓’ ‘무능한 정부 탓’ 이유가 어떻든 세월호처럼 머뭇거리다 골든타임을 놓친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순간의 방심과 오판이 돌이킬 수 없는 화(禍)를 불렀습니다. 코로나가 촉발한 대혼란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악성 바이러스가 곯고 병든 우리 사회를 숙주로 삼으려 공격했고, 잠복해있던 부조리와 불신과 결합하면서 빚어낸 결과입니다.

문 대통령님이 최악의 국가적 재난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그래야 국민도 피와 눈물, 땀을 기꺼이 드릴 겁니다. 그 통합의 힘으로 인간과 바이러스의 전쟁, 우리 내부 부조리와의 전쟁을 동시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잔인한 시간들을 뒤로 하고 바이러스에게 빼앗긴 봄을 되찾아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 선택은 대통령님에게 달렸습니다.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