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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민심 이반 부르는 코로나 대응 자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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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국민 정서 민감하게 건드린 치명적 장면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에 대한 충격과 공포,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뒤범벅된 분위기다. 정부의 잇따른 자충수로 민심 이반까지 우려되고 있다. 최근 한국 갤럽조사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한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섰다. 정부의 총체적 실패에 대한 분노다. 불과 2주 만에 국민 정서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2년 전 청와대 회의 이후 성역 생겨 #정책 실패한 국토부·복지부도 멀쩡 #친문 세력이 진영 논리로 오염시켜 #대통령에 쓴소리 하기 힘든 분위기

돋보였던 초기 대응

돌아보면 초기 대응은 세계 어느 국가에 비해 단연 돋보였다. 메르스 사태의 교훈과 전문가 의견을 대폭 수용해 빠르고 깔끔하게 움직였다. 질병본부가 공항에서부터 적극 차단에 나서 첫 중국인 확진자를 잡아내 격리하는 데 성공했다. 설날 연휴 직전인 1월 19일의 일이었다. 35세 중국 여성은 곧바로 음압 병동에 격리되고 감염병 위기 경보는 ‘주의’로 상향조정됐다. 중국이 1월 23일 우한을 봉쇄하자 즉각 전세기를 투입해 우리 교민들을 무사히 충북 진천의 격리시설로 빼냈다. 하지만 설날 연휴인 1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전문가들의 경고를 외면한 채 “정부를 믿고 과도한 불안은 자제해 달라”고 하면서 불길한 조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후 헛발질이 거듭됐다.

눈살 찌푸리게 한 장면들

코로나19 첫 사망자가 나온 시기에 영화 기생충팀과 파안대소하는 청와대 오찬 장면은 민심을 악화시켰다.

코로나19 첫 사망자가 나온 시기에 영화 기생충팀과 파안대소하는 청와대 오찬 장면은 민심을 악화시켰다.

문 대통령은 2월 13일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나친 낙관론이자 안이한 인식이었다. 그 직후 사태가 악화하자 청와대는 “희망을 같이 나눈 발언으로 이해해 달라”며 수습에 진땀을 뺐다. 민심의 역린을 건드린 가장 치명적 장면은 2월 20일 영화 기생충팀과의 청와대 오찬이었다. 〈사진 1〉 그날은 첫 코로나 사망자가 나온 날이었다. 하루 전에는 31번 환자로 인해 충격적인 신천지 집단 감염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 예민한 시기에 문 대통령 부부가 파안대소하는 민망한 사진이 공개된 것이다. 청와대 참모들의 강심장과 형편없는 정무 감각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구 이마트 앞에 긴 줄이 생겼다. [뉴스1]

대구 이마트 앞에 긴 줄이 생겼다. [뉴스1]

인천공항에선 중국 보따리상들이 마스크를 박스째 반출하면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다. [연합뉴스]

인천공항에선 중국 보따리상들이 마스크를 박스째 반출하면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다. [연합뉴스]

2월 24일의 마스크 대란 현장도 분노를 자극했다. 그날 대구 이마트 앞에는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섰다. 반면 인천공항에는 마스크를 몇 박스(박스당 5000개)씩 구입해 중국으로 떠나는 카트 행렬이 끝이 없었다. 이 두 현장을 비교하는 사진이 SNS에 퍼지면서 청와대 게시판의 문 대통령 탄핵 청원 동의가 순식간에 5만→50만→100만명으로 늘어났다. 〈사진 2, 3〉

각료·측근들의 자충수

2월 25일에는 민주당 수석 대변인이 대구·경북 봉쇄를 언급했다. 같은 날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에서 “코로나19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고 답변해 역풍을 자초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유럽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 그 직후 황교안 통합당 대표가 여야 대표회담에서 박능후·강경화 장관을 콕 찍어 경질을 요구했지만 문 대통령은 “사태 종식 후 복기하겠다”며 선을 그었다.

따지고 보면 언젠가부터 장관이나 대통령 측근들의 자충수와 설화(說禍)가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책임 추궁은커녕 오히려 친문 네티즌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결과 관료와 전문가들은 침묵한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이런 왜곡 현상의 근원을 2018년 봄에 열린 청와대 비공개회의에서 찾고 있다. 극소수 측근들이 참가한 이 회의의 정확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청와대 담장을 넘어 고약한 소문이 번졌다는 게 문제다.

관료사회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한 참모가 “탈원전의 방향과 속도를 좀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으나 대통령이 외면했다고 한다. 이 참모가 거듭 “최소한의 원전 생태계는 유지하도록 하자”고 건의하자 대통령이 “이제 그런 말 그만 좀 하세요. 꼭 원전 하고 싶다면 자기들이 다음에 대통령 돼서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세요”라고 말을 잘랐다는 것이다. 이후 탈원전·소득주도 성장·대북 지원 등은 모두 성역이 돼 버렸다. 정부 부처에서 새 정책 아이디어를 냈다가 참여연대나 민주노총이 항의하면 청와대 비서실이 득달같이 전화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말썽을 피우느냐”고 난리를 쳤다는 소문도 퍼졌다. 이후 누구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굳어졌다고 한다.

관료들의 복지부동 … 진영 논리의 부작용

문재인 정부에서 신상필벌이 사라진 지 오래다. 부동산을 난장판으로 만든 국토부 장관이나 코로나19 사태를 못 막은 복지부 장관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다. 이로 인해 “능력이 아니라 충성심이 우선”이라는 귓속말이 퍼지며 관료 사회는 복지부동이다.

문 대통령이 지나치게 ‘의지’를 강조하는 것도 문제다. 재벌 회장들을 불러모아 “투자와 고용은 의지의 산물”이라 압박한다. 하지만 투자는 기회의 산물이고, 고용은 필요의 산물이다. 기업은 돈 벌 기회가 보이면 사채라도 끌어와 투자하고, 꼭 필요한 인력이라면 경쟁업체에서 몰래 빼내 올 정도다. 이런 생리를 무시한 채 ‘의지’만 주문하면 투자나 고용이 늘어날 리 없다. 마스크 대란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대중 수출은 막지 않은 채 “마스크는 우리 수요를 감당하기 충분한 생산능력이 있다. 의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결국 현실에 바탕한 구체적 정책 대신 의지만 강조하다 마스크 대란을 맞은 것이다.

상대 진영이 아니라 코로나와 싸워야

지난 한 달간 청와대·민주당은 의사협회 등 전문가 건의를 “정치하느냐”고 비난하며 귀를 막았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은 정치 본색을 드러내며 자충수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정부의 실패를 넘어 국민의 피해로 돌아오고 있다. 전 세계 90여 개국에서 ‘코리아 코로나’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우리 국민이 격리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코로나 사태는 최대의 정치 이슈가 됐다. 어제 보도된 중앙일보·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중도층의 61%가 “코로나 사태가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제라도 정부 여당은 야당이나 보수 진영이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전문가 의견에 귀 기울이며 설날 연휴 이전처럼 초기의 스마트한 대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다.

노무현의 ‘사스 기적’ 뒤엔 행정의 달인 고건이 있었다

2003년 4월 28일 고건 당시 국무총리의 사스 대국민 담화 원고. [중앙포토]

2003년 4월 28일 고건 당시 국무총리의 사스 대국민 담화 원고. [중앙포토]

2003년 3월 18일 노무현 정부는 발 빠르게 사스 경보를 발령했다. 정권 출범 한 달도 되지 않은 어수선한 시점이었지만 이후 114일간 치열한 비상방역을 펼쳤다. 노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에 이어 또 국무총리가 된 ‘행정의 달인’ 고건 총리에게 전권을 주었다. 그해 4월 고 총리가 사스 종합상황실을 세우면서 선포한 ‘대국민담화’는 강경했다. “만약 여러분이 환자나 유사환자라면 바로 사랑하는 가족을 전염시킬 수 있습니다. 정부는 사스 의심이 들면 10일간 격리하겠습니다. 지체 없이 동의해 주십시오.”

고 총리는 컨트롤타워로서 총력전을 지휘했다. “가장 부족했던 건 방역 요원이었다. 처음에 간호대 학생들을 동원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결국 국방부 장관에게 명령해 군의관과 군 간호사를 동원하게 됐다.” 군 의료인력까지 비상 투입하면서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전국 242개 보건소가 중국·홍콩 입국자 23만명에 대해 전화 추적조사를 벌였다.

인천공항에선 방역 요원을 기내에 들여보내 항공기 5400여 대의 탑승객 62만여명, 선박 1만여 척의 탑승객 28만여 명 등 90만여 명을 검역했다. 환자 접촉자 등 2200여 명은 강제로 자가 격리시켰다. 이에 대해 인권침해라는 비난이 일자 노 대통령이 직접 설득에 나섰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게 최고의 인권입니다.”

당시 전 세계 사스 확진자는 8096명, 사망자는 774명으로 치사율이 9.6%에 달했다. 중국에선 336명이 숨졌다. 이에 비해 한국은 환자 3명 발생에 사망자는 없었다. 중국과 홍콩에서 “한국인은 김치 때문에 사스에 안 걸린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모범 방역국이었다. 정부는 그해 7월 7일 사스 사태의 종료를 공식 선언했고, 같은 날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선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