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뇌물 안받아" 국정농단 주심 조희대, 조용히 떠났다

중앙일보

입력 2020.03.04 05:00

조희대 선임대법관이 지난 1월 9일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간담회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인사말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희대 선임대법관이 지난 1월 9일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간담회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인사말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68) 전 대통령이 임명한 '미스터 소수의견' 조희대(63·연수원 13기) 대법관이 6년의 임기를 마친 3일 법원을 떠났다. 조 전 대법관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퇴임식과 퇴임사도 없이 후임자인 노태악(58·연수원 16기) 신임 대법관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조 전 대법관을 보좌했던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은 "이렇게 퇴임사도 없이 보내드릴 순 없다"고 조 전 대법관을 설득했지만 "나에 대해 아무런 말도 돌지 않게 해달라"는 당부만 들었다고 한다. 이날 김명수(61·연수원15기) 대법원장 및 동료 대법관과의 조촐한 송별회를 끝으로 경주 유금리에서 농사를 짓던 시골청년 조희대의 34년 법관 생활이 마무리됐다.

김명수 대법원의 소수의견 조희대  

경북 경주 출신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조 전 대법관은 김명수 대법원 체제에서 '미스터 소수의견'으로 불릴만큼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 왔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보수의 대변자라 불릴만큼 주요 판결 때마다 소수의견에 섰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3월 4일 오후 청와대에서 조희대 신임 대법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br〉[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3월 4일 오후 청와대에서 조희대 신임 대법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br〉[청와대사진기자단]

조 전 대법관이 소수의견에 섰던 가장 대표적인 판결은 본인이 주심을 맡았던 국정농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조 전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어떠한 뇌물도 요구하지 않았고 이익을 취했다고 드러난 것이 없다"며 일부 무죄취지의 파기환송 필요성을 주장했다. 조 전 대법관은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가 삼성그룹으로부터 받은 말 3필에 대해서도 "말의 소유권이 최씨로 넘어가지 않아 뇌물로 보기 어렵다"는 소수의견을 밝혔다.

국정농단·블랙리스트 모두 무죄취지 주장

조 전 대법관은 김기춘(81)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54) 전 정무수석이 기소됐던 '문체부 블랙리스트' 판결에서도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밝히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 역시 다수와는 다른 별개의견이었다. 조 전 대법관은 현 정부 인사들이 청와대 캐비닛에서 발견한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을 국정농단 특검에 제공한 것은 위법한 증거에 해당한다며 "이런 행위는 청와대가 전임 정부에서 활동한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보복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참 온순한 분인데 이런 날선 주장을 했었을 땐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조희대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던 국정농단 전원합의체 판결 3명의 피고인들. 왼쪽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조희대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던 국정농단 전원합의체 판결 3명의 피고인들. 왼쪽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연합뉴스]

통상적으로 선임 대법관은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관간의 의견이 팽팽할 때 대법원장과 함께 다수의견에 서며 '8:5'의 판결을 맞추는 것이 관례다. 그래야 대법원 판결에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 전 대법관은 그런 경우에도 김 대법원장과 각을 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명수 대법원에선 '7:6'의 1표차 전원합의체 판결이 자주 나왔다.

백년전쟁서 김명수와 각세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1표차(7:6)로 결론이 났던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파기환송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묘사한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역사의 평가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란 취지였다.

하지만 조 대법관은 반대의견은 물론 보충의견까지 밝히며 "개인의 인격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이 방송이 공동체의 선에 무슨 기여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김 대법원장과 다른 의견에 섰다. 조 전 대법관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병역거부와 관련된 진정한 양심이 존재하는지 심사할 수 없다"며 반대의견에 섰다.

김명수 대법원장(왼쪽)과 조희대 대법관이 지난 1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왼쪽)과 조희대 대법관이 지난 1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보수 진영 넘어서는 판결도  

조 전 대법관은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를 근로자로 인정한 판결,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된 더불어민주당 소속 권선택 전 대전시장 사건을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한 판결도 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에선 유죄취지의 소수의견에 섰다. 진보와 보수의 진영을 넘어서는 입장을 내놓은 거다. 조 전 대법관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2018년 6월에는 다른 대법관들과 함께 "재판거래는 없었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조 전 대법관은 최근 사석에서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드러냈다고 한다.

조 전 대법관과 근무한 경험이 있는 현직 부장판사는 "소탈하고 겸손했다. 진보적 보고서를 냈던 재판연구관들에겐 먼저 밥을 사주시며 의견을 경청했다"고 말했다. 진보적 성향의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보수적 입장에 섰을지라도 모든 사건에서 법리에 충실했던 동료였다"고 회고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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