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눈

중국에 에너지 주권 넘긴 필리핀…한국은 그 길 안 따라야

중앙일보

입력 2020.03.0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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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에너지 지정학과 문명환경론

시진핑 중국 주석(왼쪽)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2018년 11월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남중국해 자원 개발에 합의한 뒤 건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주석(왼쪽)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2018년 11월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남중국해 자원 개발에 합의한 뒤 건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에너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명제는 제국주의 시대에나 통했던 철지난 슬로건이 아니다. ‘에너지 지정학’은 여전히 오늘의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진실 중의 하나다. 미국이 2010년 이후 석유의 나라 중동에서 서서히 손을 떼고 중국 봉쇄에 집중하게 된 배경엔 자국 내 셰일 오일(일종의 암석 오일)을 무제한 캐낼 수 있는 신기술의 발견이 있었다. 미국의 셰일 오일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저유가 시대를 열었는데 이 때문에 오로지 원유 판매만으로 흥청망청 공짜 천국 놀이를 즐겼던 베네수엘라는 순식간에 종말을 맞았다.

“필리핀 전력망 컨트롤이 난징에”
지난 해 11월 CNN의 충격적 보도
에너지 주권 수호는 생물학적 본능
문 정권 3년 만에 주변 먹잇감 우려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중심이라는 강점을 활용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요지를 연결하는 천연가스 파이프 라인 구상을 일부 실천에 옮겼다. 첫번 째 결실인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가스관 건설은 주변국에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의 악몽을 80년만에 떠올리게 했다. 2019년 말 미국의 상원이 수만명의 미군 주둔국이자 핵심 동맹국인 독일에 대해 경제 제재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러시아의 가스관은 미국의 스트레스가 되었다.

현재 세계의 에너지 권력이 가장 뜨겁게 충돌하는 곳은 중국의 동쪽 해안 경계선을 따라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를 넘어 아라비아 반도 연안에 이르는 진주 목걸이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일본의 영해와 맞닿은 동중국해에서 시작해 대만, 필리핀, 홍콩, 베트남, 싱가포르를 아우르는 남중국해까지 해상 공간에서 미국과 중국의 권력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개별 나라들을 힘으로 압박하거나 돈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방식으로 자국에 유리하게 에너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양강 대국이 벌이는 싸움터다.

지구상의 나라들은 대소강약을 떠나 너나 할 것 없이 에너지 주권을 쥐고 행사하기 위한 활동을 벌인다. 이런 행위는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생물학적 본능에 가깝다. 어떤 정권이든 국가 경영의 운전대를 잡으면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다른 나라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에너지를 수송하는 문제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다만 정권이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다음의 네 가지다. ①국가 무력이 현저하게 약하거나 ②축적된 국부가 워낙 빈약하거나 ③국민이 극도로 분열되어 있거나 ④권력의 리더십이 매우 취약할 때다. 이럴 때 에너지 주권은 다른 나라로 넘어가 버린다. 에너지 침탈은 의식을 예민하게 벼리지 않으면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다. 한 때 ‘아시아의 진주’로 풍요의 상징이었던 필리핀이 그러했다. 격렬한 반미 운동의 결과로 1992년 수비크만에 주둔하던 마지막 미군이 철수한 뒤 20여년만에 필리핀은 에너지 주권을 사실상 중국에 넘겨주었다.

2012년 수비크만에서 불과 120해리 떨어진 암초섬에 군을 침투시켜 콘크리트 활주로를 일방적으로 깔면서 그 쪽 해상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건 중국이 힘으로 필리핀을 압박한 경우다. 돈으로 필리핀을 끌어 들인 경우도 있다. 2009년 중국의 국영 전력회사인 국가전망유한공사(SGCC)가 필리핀 전체 가구의 78%에 전력을 공급하던 필리핀전국송전회사(NGCP)의 지분 40%를 사들였다. 당시 필리핀 정부는 적자 누적에 시달리던 NGCP를 민간에 매각했는데 이 틈을 타 중국의 국가 자본이 최대 주주가 된 것이다. 중국은 아울러 필리핀 전력회사에 운영 인력을 공급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운영 인력을 중국인이 차지하게 되자 그 회사의 통신 장비가 중국 회사인 화웨이 제품로 채워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NGCP는 한국의 한국전력에 해당하는 회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에너지 주권의 중국 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았다.

불과 넉달 전인 2019년 11월 26일(현지 시간) 상황이 명료해 졌다. 미국의 CNN방송이 필리핀 의회의 상원에서 회람된 내부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은 에너지 종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보고서 내용 중 눈길을 끈 것은 “필리핀의 NGCP를 제어하는 시스템이 중국 난징에 있다”는 대목이다. 필리핀 전력망의 컨트롤 타워가 필리핀 영토가 아닌 중국에 있다는 얘기는 충격적이다. CNN이 보도한 보고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중국 난징에 있는 NGCP 제어 시스템의 운영과 관리는 관련 기술을 중국 엔지니어들이 독점하고 있다. 필리핀 엔지니어들은 핵심 시스템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 일부 매뉴얼은 중국어로만 제공되었다. 중국 엔지니어들만이 NGCP 핵심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다. 필리핀 전역의 전력망이 사실상 중국 정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다.”

CNN의 보도 이후 중국 외교부는 “필리핀은 중국의 중요한 이웃이다. 지나친 걱정으로 사실을 날조해선 안된다”며 필리핀 의회에 불쾌한 반응을 드러냈다. 하지만 에너지 주권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평상시 양국 관계가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건 극단적으로 관계가 악화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전쟁같은 경우다. 나라의 안보와 직결되는 주권 문제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다뤄져야 한다. 에너지 시스템은 나라의 심장과 같다. 자기 심장을 남에게 넘겨준 나라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정상적으로 하긴 어렵다.

이제 우리나라 얘기로 돌아올 차례다. 한국은 원래 에너지 주권이 없었다. 원유 등 에너지 자원 자체가 결핍됐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건국 초기에 절대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기대야 했다. 산업화 이후에도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다. 한국의 원자력 엔지니어들이 ‘두뇌에서 캐낸 에너지’라는 원자력 기술을 완전 국산화할 때가 1990년대 후반이었다. 이로써 한국에서 처음으로  에너지 주권 개념이 성립하였다. 1970년 외국에서 수입한 최초의  원자로가 들어선 지 30년만이다.  한국인에게 지켜야 할 에너지가 생겼고 → 그 에너지를 수출할 수 있었으며(2009년 아랍에미리트와 원전 건설및 운영 계약 체결) →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 수준이 인정되었다(2019년 미국 원자력규제기관인  NRC에 의해 한국형 원전 설계인증).

문제는 2017년에 집권한 문재인 정권이었다. 이들이 무리한 탈원전 정책을 3년 가까이 밀어 붙이자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체코 등지로 가시화됐던 원전 수출이 무산되었다. 한국 내에 대, 중, 소 기업끼리 형성됐던 한국형 원전 생태계도 파괴되었다. 두산중공업에서만 2000명의 원전 기술자가 구조 조정됨으로써 현재 가동중인 원전의 안전성 자체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한국 에너지 주권의 원천이었던 원자력 기술은 이 정권 들어서 수출 중단 → 생태계 파괴 → 안전성 위협이라는 대재앙의 수순을 밟고 있다. 에너지를 지배해 세계를 지배하기는 커녕 에너지를 포기해 주변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떨어지는 신세로 전락했다. 에너지 주권, 세우는 데 30여년 걸렸으나 무너지는 데는 3년도 안걸렸다.

느닷없는 중국 기업 입찰 자격 타진 … 한전, 노림수 있나
제주~진도 구간에 깔릴 해저 케이블이 선박에 선적되고 있다. [사진 LS전선]

제주~진도 구간에 깔릴 해저 케이블이 선박에 선적되고 있다. [사진 LS전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던 2017년 5조원의 영업 이익을 내던 한국전력(사장 김종갑)은 2018년 마이너스 2000억원, 2019년 마이너스 1조3500억원이라는 유례없는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원전 조업률을 2017년 대비 인위적으로 확 줄인 게 악영향을 줬다.

한전은 현재 전기료 인상과 비용 절감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올해 착공 예정인 2000억원 규모의 제주~완도간 직류 해저 케이블 건설에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중국 업체를 참여시킨다는 발상이 나왔다. 중국은 고압송전 기술국의 증명인 세계단락시험협의체(STL) 회원국이 아닌데다(한국은 2011년 진입 성공)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부조달협정(GPA)에도 가입 허가를 받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한전은 지난해 해당 프로젝트 관련 설명회에 중국 업체를 참여시켰고, 최근엔 기획재정부에 “GPA 미가입국도 입찰에 참여시킬 수 있느냐”는 유권해석을 요청해 “발주기관이 스스로 판단할 사항”이라는 답변을 받아놨다. 이 사실이 열흘전쯤 서울경제신문에 처음 공개되자 한전측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의 도를 넘는 친중 정책과 한전의 비용절감 요구가 맞물려 중국 전력기업의 낙찰 가능성은 살아 있다. 에너지원의 균형 잡힌 배치와 전력 송배전 기술의 수호는 국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핵심 노하우이자 인프라다. 에너지 주권의 일부를 중국에 헐값으로 팔아넘길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한 문재인 정부의 지난 3년 탈원전 정책이 야속할 뿐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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