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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개인회생, 31살 희귀암…그의 목 조인 '채무자회생법'

중앙일보

입력

27살 청년은 어떻게 채무자가 됐나

송연주(33)씨는 27살이던 2014년 1월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밀린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를 신용카드와 카드론으로 돌려막다 2600만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사무보조 일을 하며 받는 세후 1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부모를 봉양하던 그는 5년 동안 매달 34만원(총 2040만원)을 갚는 조건으로 회생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개인회생 ‘졸업’을 불과 1년 앞둔 2018년 1월 희귀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송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버텨왔던 삶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송씨는 4년째 공황장애와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송연주씨가 보내온 신발 사진. 그는 "비가 오면 물이 새지만 그나마 제일 따뜻한 신발"이라며 한 켤레로 몇년째 겨울을 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송연주

송연주씨가 보내온 신발 사진. 그는 "비가 오면 물이 새지만 그나마 제일 따뜻한 신발"이라며 한 켤레로 몇년째 겨울을 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송연주

“단순한 피부병”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왼쪽 뺨에 난 혹은 종양이었다. 피부과와 종양내과, 대학병원 이비인후과를 거친 끝에 침샘암 4기란 진단을 받았다. 종양 제거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생활고가 시작됐다. 매일 이어지는 방사선 치료에 회사를 그만둬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송씨는 대전과 서울을 왕복하며 치료를 받는다. 항암 치료의 끝은 기약이 없다.

기초수급자 목 조인 대법원 

송씨는 퇴사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초수급자로 등록된 것이 “그해 가장 기뻤던 일”이라고 했다. 그가 한 달에 구청에서 받는 수급비는 주거급여를 포함해 약 57만원. 매달 빠져나가는 34만원의 회생 변제금은 그의 목을 조였다. 그는 “수급비에서 변제금을 내고 나면 병원 다닐 교통비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송씨의 기초 수급자 증명 서류. 사진 송연주

송씨의 기초 수급자 증명 서류. 사진 송연주

변제금을 정상적으로 갚아나갈 수 없었던 송씨는 2018년 1월 서울회생법원에 자신의 병력과 퇴사 사실 등을 소명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그의 남은 채무를 대폭 삭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업자의 이의제기가 시작됐다. 거듭된 항고 끝에 송씨가 받아든 대법원의 결정은 ‘파기환송.’ 대법원은 “채무자의 사정에 관해 제대로 심리하지 않은 채 변제계획 변경안에 허가를 내줬다”며 사건을 1심 법원에 돌려보냈다.

송씨가 회생 법원으로부터 채무 삭감을 받고 대법원이 이를 뒤엎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6개월. 만약 회생 법원이 당초 결정을 취소한다면 그는 12개월간 408만원을 추가 변제해야 한다. 연체 기록이 쌓이면 4년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송씨의 변제 내역. 암 선고를 받기 전인 2018년 1월까지 총 48개월 간 1600여 만원을 갚았다. 사진 송연주

송씨의 변제 내역. 암 선고를 받기 전인 2018년 1월까지 총 48개월 간 1600여 만원을 갚았다. 사진 송연주

특별면책의 문턱

송씨는 특별히 불운했던 것일까. 취재진이 인터뷰한 다수의 파산법 전문가들은 “개인회생 중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거나 병을 얻게 된 채무자를 구제해줄 제도가 촘촘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송씨가 보내온 식사 사진. 주로 두부와 김치를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했다. 사진 송연주

송씨가 보내온 식사 사진. 주로 두부와 김치를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했다. 사진 송연주

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채무자가 실직·상해·재난 등으로 노동 능력을 상실할 경우 상환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해도 법원의 재량으로 면책을 받을 수 있는 특별면책 제도가 있다.

하지만 실제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채무자는 드물다는 것이 서울회생법원의 설명이다. 지난해 서울회생법원에서 특별면책을 받은 채무자는 35명에 불과했다. 일반면책(만기까지 완납)을 받은 회생자가 1만4000여 명임을 고려하면 전체의 약 0.24%만이 특별면책 대상자가 되는 셈이다.

송씨가 복용 중인 정신과 치료약. 그는 2017년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고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 송연주

송씨가 복용 중인 정신과 치료약. 그는 2017년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고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 송연주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장은 “특별면책은 실무적으로 극히 드물게 가동되는 제도”라며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변제가 어려워질 경우 연체로 인한 개인회생 폐지 수순을 밟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개인회생을 폐지할 경우 탕감 예정이었던 채무가 되살아난다. 채무자가 파산이나 회생을 다시 신청할 때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없다.

특별면책 허가가 주먹구구식으로 내려진다는 점도 문제다. 백주선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장은 “특별면책 기준에 관한 예규가 없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통일된, 예측 가능한 기준이 없다”고 꼬집었다. 법원마다 변제 불능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이 제각각이란 뜻이다.

채무자가 재산을 빼돌린다면?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는 없을까. 서울회생법원 공보관을 지낸 이주헌 판사는 “재산을 은닉하고 허위로 개인파산·회생을 신청하는 이들을 적발하기 위해 친족은 물론이고 이혼한 배우자의 재산 내역, 10년 간 거주지 변동 및 금융 거래 내역등 50여 종의 서류를 제출 받았던 과거에도 도덕적 해이가 적발된 사례는 많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채권자의 이의 제기가 없으면 즉시 채무 탕감 결정을 내리는 미국법원과 달리 관재인이나 회생위원의 조사를 무조건 거치는 한국은 오히려 도덕적 해이에 대한 감시가 철저히 이루어지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백주선 변호사는 “개인회생 사건의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준 원채권자가 아닌 양수채권자인 경우가 많다”며 “헐값으로 부실 채권을 사온 대부업체를 보호할 필요성이 채무자들의 사회 복귀 필요성보다 크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셋 중 하나 탈락하는 ‘마의 3년’

2018년 이전까지 개인회생자들은 5년 동안 매달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모든 수입을 변제해야 일반 면책을 받을 수 있었다. 5년을 완주하지 못하면 회생자 자격이 폐지되고 이자를 포함한 모든 채권이 되살아나며 추심이 재개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5년 사이 개인회생사건의 인가 후 폐지 비율은 27.7%다. 개인회생자 셋 중 한 명은 중도 탈락한다는 뜻이다.

특히 3년차는 마의 구간으로 불린다. 개인회생 중도 탈락자의 60.3%가 변제  2~3년차에 탈락하기 때문이다. 잦은 중도 탈락으로 채무자의 사회 복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에 법도 바뀌었다. 2017년 채무자회생법개정안은 최대 60개월이었던 변제 기간을 36개월로 단축했다. 변제 기간 상한을 최대 36개월로 하는 일본 민사재생법과 미국 파산법 등 선진국의 제도를 참고했다.

대법원이 엎은 법, 국회서 살아날까 

문제는 부칙이었다. 개정안 부칙에 ‘2018년 6월 13일 개정안 시행 후 최초로 신청하는 개인회생 사건’부터 단축안을 적용한다는 단서가 달렸기 때문이다.

신청 시기에 따라 변제 기간이 달라지고 채무자간 형평성 문제가 생기자 서울회생법원이 팔을 걷고 나섰다. 법 개정 이전 사건에 대해서도 변제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할 수 있도록 업무지침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개정 이전 규정에 대한 채권자 신뢰가 공익상의 요구보다 더 보호 가치가 있다”며 소급 적용을 불허했다.

칼자루는 다시 입법부에 돌아갔다. 박주민의원이 개정법 시행 전 회생 신청자의 변제기간도 최대 3년으로 제한하는 채무자회생법 부칙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채무자 3만명의 사회 복귀가 2년 앞당겨진다.

채무자회생법 부칙 개정안의 운명은 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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