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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전직 대통령이 도주?"…법정구속 관행이 한 방 맞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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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6일 만에 번복된 이명박 재구속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달 19일 오후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 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고 있다. 그는 징역 17년 선고와 함께 자신에 대한 보석 허가가 취소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달 19일 오후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 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고 있다. 그는 징역 17년 선고와 함께 자신에 대한 보석 허가가 취소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코로나19’의 공포가 확산된 지난주, 법조계의 이슈는 단연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법원 결정으로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나온 건 지난주 화요일(25일) 저녁 7시 37분. 그는 논현동 자택에 돌아와 “이명박”을 연호하는 지지자들과 악수를 했다. 실형을 선고받고 재구속된 지 6일 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보석취소에 재항고 ‘구속 집행정지’ #“대법원 결정까진 최소 5, 6개월” #‘실형 선고=법정구속’ 옳지 않다 #판결 확정까진 무죄추정 지켜야

“피고인에게 징역 합계 17년의 실형을 선고합니다. 보석을 취소합니다.”

형량이 1심(징역 15년)보다 2년 더 늘었기 때문일까. 지난달 19일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부(정준영·김세종·송영승 부장판사)가 퇴정한 뒤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7, 8분 후 자리에서 일어난 이 전 대통령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방청객들에게 인사했다. “고생했어. 갈게.” 그는 구치감으로 들어갔다.

엿새 후 변호인인 강훈 변호사는 서울고법 재판부에 보석 취소 결정에 대한 재항고장을 내고, 구속 집행의 ‘즉시 정지’를 요청했다. 재구속을 했던 재판부가 다시 제 손으로 신병을 풀어줄 것인가. 석방 결정이 나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재항고에 정지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 견해 대립이 있어 (대법원) 결정 때까지 구속 집행을 정지할 필요가 있다.”

검찰은 “재항고장 접수 후 두 시간 만에 검사의 의견도 듣지 않고 구속 집행을 정지했다”며 반발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강훈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명박 정부의 첫 법무비서관이었던 그는 이 전 대통령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이 세웠던 로펌(법무법인 바른)을 나왔다. 그에게 재항고한 이유부터 물었다.

“보석 취소 결정문에 사유가 형사소송법 102조2항 2호, ‘도망 및 증거인멸 염려’로 나와 있었다. 항소심까지 끝났으니 증거인멸 가능성은 없는 것이고, 결국은 도주 우려라는 얘긴데…화가 좀 났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24시간 밀착 경호를 받는다는 것은 국가기관이 신병을 확보하고 있다는 거 아닌가. 해외로 몰래 빠져나갈 수도 없고…도주할 우려가 아니라, 아예 도주할 방법 자체가 없다. 그래서 법조문을 찾아봤더니 법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원 안)이 지난 달 25일 저녁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석방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원 안)이 지난 달 25일 저녁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석방되고 있다. [연합뉴스]

법적인 문제라면.
“형사소송법 410조와 415조는 고등법원 결정에 대해 재항고, 즉 ‘즉시 항고’를 하면 재판의 집행을 정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석서를 좀 더 검토해보니, 재항고 제기 기간(7일 내)이 지나기 전까진 구속 집행을 할 수 없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 기간 내에 보석 취소를 하고 구금까지 한 것은 위법한 결정이다.”
대법원 결정은 언제쯤 나올 것 같나.
“대법원으로 사건기록이 가고,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고, 주심 대법관 지정되는 것까지 고려하면 두 달은 지나야 검토를 시작할 수 있다. 사건 파악이 돼야만 핵심 쟁점인 ‘도주 우려’ 여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미니멈(최소한) 5, 6개월은 걸릴 거다. 사건기록만 10만 페이지가 넘는다. 내 짐작엔 본안 사건과 함께 선고되지 않을까 싶다.”
이 전 대통령 반응은?
“항소심 판결에 기대를 걸었던 대통령의 실망감이 너무 컸다. 징역 17년 선고 후 ‘법원이 미리 결론 정해놓고 재판한 것 아니냐’며 상고하지 않겠다고 해서 설득하느라 애먹었다. 석방된 뒤 ‘재판부가 잘 모르고 보석 취소를 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정말 모르고 한 게 맞느냐’고 물었다.”
대법원에선 어떻게 다툴 계획인가.
“MB는 초지일관 무죄를 주장해왔다. 물증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진술뿐이다. 핵심증인인 김백준(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9차례나 법원 소환에 불응하자 재판부에서 김백준의 검찰 진술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그 진술을 토대로 판결했다. ‘김백준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재판부가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하도록 유도한 뒤 유죄를 선고한 것도 소송지휘권을 넘어선 거다. 상고심에서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재항고와 즉시항고에 관한 법률 규정들이 모호한 데서 나온 혼선”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판사들도 헷갈릴 만큼 관련 법조문이 명확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뒤늦게 ‘견해 대립이 있다’는 이유로 예측 가능성을 깨뜨린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법 절차를 둘러싼 이러한 논란 뒤엔 더 큰 문제가 버티고 있다. ‘실형 선고=법정구속’이란 등식이 옳으냐는 것이다. ‘실형이 선고되면 실형을 피하기 위해 도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진짜 도주할 가능성이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실형을 선고받고 오히려 “무죄를 입증하고야 말겠다”며 더 치열하게 법정에서 싸울 수도 있다.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헌법의 무죄추정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만 예외적으로 법정구속해야 한다. 불구속 상태에서 최대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원칙은 전직 대통령이든, 시민이든, 보수든, 진보든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이번 논란은 특정 재판부의 문제가 아니다. 판사 사회의 집단무의식 속에 있던 ‘법정구속’의 고정관념이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이다.

하긴, 관중들도 다르지 않다. 비리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법정에서 구속되면 속 시원해들 하면서 손뼉 치지 않는가. 구속 만능주의는 사람 몸을 볼모로 잡아놓고 흥정하는 ‘인질(人質) 사법’을 부르고, 전관(前官)들의 배를 불린다.

전직 대통령 이명박은 정치검찰을 부활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인기 없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절차적 정의에 따라 재판받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재판은

● 2018년 3월 22일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수감
10월 5일 1심, 징역 15년 선고
● 2019년 3월 6일 항소심, 이 전 대통령 보석 허가
● 2020년 2월 19일 징역 17년 선고. 보석 취소 결정
24일 이 전 대통령, 대법원에 상고
25일 변호인, 보석 취소에 재항고
항소심, 구속 집행정지. 석방
27일 검찰, 집행정지 결정에 항고

판사에게 법정구속 요구하는 위헌적 예규 폐지해야

‘피고인에 대하여 실형을 선고할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정에서 피고인을 구속한다.’

‘인신구속사무의 처리에 관한 예규’ 제57조다. 2003년 제정된 이 재판 예규는 옳은 것일까.

‘불구속 재판’은 형사사법의 대원칙이다. 헌법은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구속되지 아니한다’(12조)고, 형사소송법은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염려가 있는 경우에는 구속할 수 있다’(70조)고 못박고 있다. 대법원 예규는 불구속 재판을 받던 피고인에게 실형이 선고되면 원칙적으로 법정구속을 하도록 함으로써 헌법과 법률의 불구속 원칙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다.

문제의 예규는 재판 현장에서 너무도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다. 주요 사건 재판이 있을 때마다 피고인이 법정구속 되곤 한다. 한 원로 법조인은 “법정구속 예규에 대해 헌법소원을 하면 100% 위헌 결정이 나올 것”이라며 “이런 규정이 있다는 걸 외국 법원에서 알게 되면 한국 판사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느냐”고 했다. 법조계에서도 “헌법에 보장된 법관의 재판 독립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예규 폐지’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데도 대법원이 해당 예규를 유지하는 이유는 뭘까.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판사들의 사고 속에 ‘구속 재판이 원칙’이란 그릇된 관념이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형 선고하면서 법정구속을 하지 않으면 자기 판결에 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판사들 사이에 있습니다. 또, 누구는 법정구속하면서 누구는 법정구속하지 않으면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여론의 비판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고요. 기본적으로는 법원 내부에서 형사사건 법리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대법원은 ‘법정구속’ 규정을 없애고, 판사들은 오로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잣대로만 판단하면 된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