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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외면한 정치 논리는 재앙 부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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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코로나19 사태로 한국인을 기피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격리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조차 역유입을 막는다며 한국인 입국자들을 강제 격리하고 있다. 상하이(上海)·칭다오(靑島) 등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집이 봉쇄되기도 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일부 지방 정부에서 하는 조치”라고 한다. 중국이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이후 한국 관광 금지와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등 보복 조치를 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 중앙 정부 차원의 조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전문가 무시하다 코로나19 확산 #문 정부의 이념 앞세운 정책들 #현실 적합성 따져 재검토해야

한국인이 어쩌다 전 세계가 꺼리는 국민이 됐나. 코로나19 감염자가 많은 한국인이 입국하면 자국 감염이 늘어날까 우려한다. 한국의 감염자 폭증은 정부 대처가 미숙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코로나19 발생 초기 전문가들의 권고를 무시했다. 대한감염병학회는 지난달 2일과 15일 두 차례 권고문을 내고 중국 입국 제한 확대, 지역사회 감염 확산 차단, 원인 불명 감염자 급증 대비, 음압 병상 포화 우려 등을 경고했다. 대한의학협회는 일곱 차례에 걸쳐 중국인 입국 금지를 건의했다.

정부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대통령의 발언은 현실과 동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 26일 “정부를 믿고 과도한 불안을 갖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후 확진자가 늘었다. 이틀 후 “과할 정도의 선제적 조치”를 공언했지만, 후베이(湖北)성에 대한 입국 제한은 2월 3일에야 이뤄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했지만, 확진자가 폭증했다.

서소문 포럼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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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코로나19 대응 실패는 정치 논리가 과학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중국의 반대 등을 이유로 중국인 입국 제한을 확대해야 한다는 전문가 목소리를 묵살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념이 현실을 외면하면 재앙을 초래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 현실을 외면한 극좌 운동인 대약진운동(1958~60년)과 문화대혁명(66~76년)으로 300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중국이 미국과 맞먹는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노선 덕분이다. 마오쩌둥 사후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덩샤오핑은 ‘진리 검증 기준은 실천’이라며, ‘양개범시’(兩個凡是·마오쩌둥의 말과 행동은 모두 옳다)를 내세운 화궈펑(華國鋒)을 제치고 권력을 잡은 뒤 현실에 맞는 정책으로 중국 발전을 이끌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퍼진 데는 현실보다 이념을 앞세운 시진핑 체제가 있었다. 시진핑은 자신이 덩샤오핑을 넘어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사회주의 사상가라며 이념을 앞세웠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이를 우려하는 의료진이 있었지만, 중국 공안은 유언비어라며 억눌렀다. 시진핑의 일당 지배 체제 강화는 코로나19 초기 대응 실패로 이어져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대확산) 우려를 낳고 있다.

한국 역사에서도 현실을 외면한 채 이념에 사로잡혀 공허한 논란을 벌이다 국민이 참화를 겪은 비극이 적지 않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한일병탄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현실과 맞지 않는 정책들이 잇따르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킨다며 북한과의 협상에 매달리지만, 북한 비핵화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한국의 안보 역량만 훼손됐다.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과 가깝게 지내려는 정책은 한국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약화하고 중국으로부터도 사드 보복 철회를 끌어내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처지에 빠뜨렸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세계 최고 수준이던 한국 원전 생태계를 붕괴시켜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줬다. 소득주도성장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경제정책은 자영업자들을 한계 상황으로 내몰고 좋은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시장 상황을 무시한 채 투기 단속에만 집중해 부작용을 낳고 있다.

현실은 힘이 세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실패 위험이 높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정책을 펼칠 때 현실 적합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념에 사로잡힌 현실성 없는 정책은 국민에게 고통만 줄 뿐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