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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러시아 스타일 두루 섭렵, 지식·경험으로 평가받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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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라운지] 빈 국립음대 교수 된 정상희 바이올리니스트

17일 서울 서초구 라율아트홀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 빈 국립음대 부교수. 3월부터 영재반을 맡아 강의한다. 김경빈 기자

17일 서울 서초구 라율아트홀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 빈 국립음대 부교수. 3월부터 영재반을 맡아 강의한다. 김경빈 기자

엄마의 피아노 교습소에서 피아노 밑을 기어다니며 틀린 음을 잡아내던 아기가 오스트리아 국립음대 교수가 됐다. 3월부터 빈 국립음대 영재반 담당 부교수(Senior Lecturer)로 부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31) 얘기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의 흔적이 가득한 ‘음악의 도시’에서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이 학교가 동양인을 종신 교수로 뽑은 것은 1817년 문을 연 이후 최초다. “빈 음악계가 아직 보수적인 건 맞아요. 저는 학생으로 인연을 시작해 2016년부터 학부 조교로 있었거든요. 다행히 오디션 1등을 했고, 여성 학장님이 국적, 인종, 남녀 불문한 평등한 교육 시스템 도입에 노력하시는 분이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무대부터 도전해 마이스키와 협연 #러시안 스쿨 테크닉 차근차근 익혀 #첼암제 페스티벌 직접 기획해 열어 #젊은 뮤지션과 대가들 협연 이어가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서울 등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2015년 교향악 축제 참여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귀국 독주회다. 라율아트홀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에선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 등을 맑고 투명한 소리로 들려줬다.

미샤 마이스키와의 연주가 인생 바꿔

정상희는 서울예고를 다니다 2007년 훌쩍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빈 국립음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에드워드 진코스키 교수가 서울에서 개최한 마스터클래스 참여가 인연이 됐다. “딱 한 번 레슨을 받았는데 그분 레슨에 푹 빠졌어요. 교수님도 저를 좋아하셔서 자연스럽게 가게 됐죠. 빈은 클래식뿐 아니라 오페라, 연극, 전시까지 온갖 문화예술이 넘쳐나는 도시라 기회도 많고, 뮤지션에게는 최적의 도시인 것 같아요.”

한국의 젊은 뮤지션들이 메이저 콩쿠르 입상을 목표로 활동하는 것에 비해 그는 연주 무대부터 도전했다. 2011년 체코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체스키크룸로프 국제 페스티벌에서 하이라이트 게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함께 브람스와 베토벤을 연주한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콘서트 전체가 체코 국영방송에 라이브로 방송되고 DVD까지 발매되는 큰 무대를 위해 수 년간 작은 공연으로 준비과정을 거쳤다.

“브람스 협주곡은 10번의 무대 경험을 갖고 무대에 섰는데, 미샤 마이스키는 같은 곡을 80번째 하는 거라고 하더군요.(웃음) 유럽에서는 지역마다 페스티벌도 많고 아티스트들이 각자 소도시에서 페스티벌을 기획해서 서로 네트워킹 연주도 많아요. 저는 운좋게 연주 기회를 얻어서 계속 다음으로 연결되고 있죠. 제겐 콩쿠르 우승이 아니라 매 연주를 성공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과제예요.”

빈에서는 학교에서도 시험이 아니라 연주가 우선이다. 학사, 석사 총 6년 동안 시험이라곤 졸업 연주 2번이 전부였다. “그사이 모든 걸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외부 활동도 병행할 수 있지만, 시험은 굉장히 엄격해요. 제가 처음 갔을 때는 한국 유학생이 제일 많았는데 졸업자는 별로 없었죠. 시험도 어떤 시대를 정해주면 한 시간 안에 기량을 잘 펼치고 다양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도록 본인이 직접 곡을 선택해서 준비해야 해요. 자기 강점을 잘 알아야 하는 시스템이죠.”

클래식 본고장에서의 유학생활이 결코 수월하진 않았다. 챙겨주는 교수나 멘토 없이 오직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슬펐던게, 예술후원 문화가 우리가 제일 뒤처진 것 같아서였죠. 유럽에는 장학재단이 많아도 EU권 외에는 못 받거든요. 일본·대만·중국 같은 아시아권 유학생들은 기업후원이 많은데 한국만 없었어요.”

정상희 교수가 지난해 처음 개최한 첼암제 뮤직 페스티벌에 모인 젊은 뮤지션들. 바이올린 거장 막심 벤게로프가 메인 게스트였다. 김경빈 기자

정상희 교수가 지난해 처음 개최한 첼암제 뮤직 페스티벌에 모인 젊은 뮤지션들. 바이올린 거장 막심 벤게로프가 메인 게스트였다. 김경빈 기자

자유로운 교육 시스템 안에서 갈증도 있었다. 석사를 마친 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모스크바로 떠난 이유다. “우연히 레오니드 코간의 마지막 제자인 크라브첸코 교수에게 한 번 레슨을 받았는데, 이분에게 더 배워야겠다 싶어 1주일 만에 모스크바행을 결심했어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 과정을 하면서 활쓰는 법부터 다시 배웠죠. 19세기말 20세기초 바이올린 황금시대 러시안 스쿨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거든요. 러시안 스쿨만의 훌륭한 테크닉과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을 기초부터 배워보니 그 전통이 잘 계승되는 이유를 알겠더군요. 커서 배웠기에 구조나 근본같은 복합적인 것들을 머리로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음악성을 중시하는 유럽 스타일과 테크닉을 중시하는 러시아 스타일을 모두 섭렵한 정상희는 ‘지식과 경험과 음악성’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유럽사회 일원으로서 국적이나 인종 문제로 차별을 느낀 적도 없단다. “저는 한국에서 줄리아드 출신 교수에게 배우고 비엔나에서 7년, 모스크바 영향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했잖아요. 여기선 외국인의 그런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려 하지 색안경은 끼지 않아요. 언어가 안 될 때는 저도 힘들었죠. 한국 유학생들은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서 소극적인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말을 안 하면 내가 손해더라고요. 부당하다고 느껴도 자기 표현을 못하면 그런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죠. 많이 노력했어요.”

잘츠부르크의 그림같은 호수 마을 첼암제(Zell am See)에서 페스티벌도 직접 기획해 열고 있다. 지난해 9월 개최한 제1회 첼암제 음악제는 바이올린 부문만 진행했지만, 올해는 비올라와 첼로, 클라리넷, 트럼펫까지 추가해 장르를 넓혔다. “남편의 고향인 첼암제는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굉장히 아름다운 호수 도시예요. 자연 조건이 월등한 휴양지인데도 문화적으로 많이 낙후돼 있더군요. 오스트리아인데 문화가 낙후돼 있다는 게 충격이었고, 그 동네 며느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싶었죠. 시에 제안했더니 흔쾌히 지원해 줘서 시작하게 됐어요.”

벤게로프 등 마스터클래스로 차별화

첼암제는 마스터클래스 중심의 특별한 행사다. 젊은 뮤지션들이 대가를 만나 배움과 협연의 기회를 이어가기 위한 기획이다. “저도 마스터클래스를 많이 다녔지만 수료증 받고 끝나거든요. 배우는 것과 연주 무대로 연결되는 것은 전혀 달라요. 연주 기회를 못 잡아 직업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제 경험으로만 봐도 미샤 마이스키와의 연주가 그에게는 수많은 연주 중 하나였겠지만 제게는 인생을 바꾼 연주였거든요. 내가 받은 혜택 같은 연주를 다른 사람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어요.”

지난해 메인 게스트는 바이올린 거장 막심 벤게로프였다. 우수 학생 3명을 선발해 렉처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한 마지막 연주회는 막심을 보러 온 관객들로 홀이 꽉 찼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보기드문 풍경이었다. “막심은 어린 시절 제 영웅이었거든요. 제 또래 연주자들은 그분 CD를 들으며 자랐죠. 렉처콘서트 형식이라 클래식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어서 청중들 반응도 좋았죠.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 자부합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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