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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코로나보다 더 비정한 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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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날 선 말들이 마구 찔러댄다. 비정함과 배려 없음이 무심한 증식 본능에 따라 사람을 공격하는 코로나와 닮았다. 상대에겐 무자비하고, 자기들에겐 관대하며, 국민에겐 불손한 언어들이다. “메르스 때 전 정부의 무능을 낱낱이 증언할 수 있다”(박원순), “확진자 수가 느는 것은 국가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의미”(박광온), “코로나 확산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 때문”(박능후) 같은 말들이다.

대구 시장 비난한 유시민의 입 #국민 고통 안중에 없는 진영 논리 #오만한 권력이 말의 업보 쌓는다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어찌 전적으로 문재인 정부 탓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현 정부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나비 날갯짓처럼 아주 작은 변인이 태풍 같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복잡계에 적용되는 카오스 이론이다. 누가 감염된 신천지 신도의 활보를 예측했겠나. 복잡계에서 모든 변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겸손한 자세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승기를 잡았다” “세계 최고의 방역 대응”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국민이 화난 것은 단순히 정부의 무능 때문이 아니다. 과학적 사실조차 무시한 오만, 그리고 이런 오만함이 쌓은 ‘말의 바벨탑’ 때문이다.

유시민씨의 말이 그 절정이다. 유씨는 “권영진 대구시장이 ‘중국인 입국을 못 막아서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책임을 중앙정부에 떠넘기는 총선 전략이다. 코로나를 막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만하면 병적이다. 지독한 진영 환원주의다. 얼마 전 그는 “보수정당에서 세종대왕이 나와도 나는 안 찍는다”고 했다. 대부분의 유권자가 인물이나 공약보다는 정당을 보고 찍는다는 현상 진단인데, 진영론자의 자기 고백이기도 했다. 당장 진중권씨로부터 “상대 당이라도 세종대왕 나오면 찍어 줘야지, 우리 당에서 정봉주 나온다고 찍어줍니까”라는 힐난을 들었다. 조국 부인 정경심의 증거 인멸 행위를 증거 보전이라고 우겼던 억지에 비추어 보면 유씨의 이런 태도는 새삼 놀랍지도 않다.

중국인 입국 금지는 그 실효성을 놓고 다툴 수 있다고 본다. 경제와 외교를 고려해야 한다는 정부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논리와 실증으로 다뤄야 할 문제를 유씨는 상대 진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도구로 썼다. 토론과 저술 전문가인 그가 중시해 왔다는 ‘논증’도 찾기 힘들었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문재인 대통령이 신천지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책임을 특정 집단에 떠넘기는 총선 전략”이라고 역공해도 할 말이 없다. 유씨는 문재인 정부 출범을 즈음해 자신은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 했다. 어용은 맞는 건 같은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이라면 이런 논리의 폭력을 구사할 수는 없다.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라는 진보의 가치를 팽개쳐 놓고 진보라고 자처할 수는 없다.

갈린 말들의 싸움이 거의 종교전쟁 수준이다. 그 책임을 한쪽에만 묻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책임의 추는 정부·여당에 좀 더 가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집권 세력이라는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말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측이 지금의 집권 세력 아닌가.

“코로나 사태가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이 문제되자 청와대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선의였다는 뜻이다. 날카로운 말의 비수를 들이대기만 했던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자 선의를 앞세우는 것은 어색하고 궁색하다. 대선 전 안희정씨가 “반대 진영이라도 일단 선의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가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로부터 어떤 비난과 조롱을 받았던가. 문 후보 본인조차 “안희정의 선의론에는 분노가 빠져 있다”고 비판했었다.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우리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거듭되는 여권의 언어 실패 속에서 지금 그들이 사는 세계의 한계를 느낀다. 그 한계를 들키기 싫다면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