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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인터뷰

“20~30년 뒤 한국인 노후, 각자도생의 길로 빠질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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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배정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세계 경제석학 2020 진단 ⑨ 로버트 머튼 MIT 경영대 교수

로버트 머튼 MIT 교수가 지난해 10월 세계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조찬 강연회에서 ‘초저금리 시대의 금융 혁신과 자산운용 전략’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로버트 머튼 MIT 교수가 지난해 10월 세계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조찬 강연회에서 ‘초저금리 시대의 금융 혁신과 자산운용 전략’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으로 20~30년 뒤에는 더 많은 한국인이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빠질 것이다.”

국민연금에만 의존하지 말고 #개인연금·투자도 병행해야 #주택연금은 은퇴자에게 축복 #글로벌 저금리 기조 계속될 것 #금융당국 신뢰 받아야 핀테크 잘돼 #금융모델·이론 신봉하지 말아야

199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Robert C. Merton·75)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의 최대 관심사는 ‘은퇴 재무 설계’다. 그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 사회를 유난히 걱정했다. 노년층의 빈곤과 젊은 층의 부담이 경제 성장률을 짓누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머튼 교수는 한국의 국민연금 적립금이 2040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60년 고갈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만 믿고 각자 스스로 노후 대비를 하지 않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그는 “근로자가 매달 납부하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지금의 9%에서 더 늘리기는 어렵고, 정부의 보조금을 임시방편으로 삼아 버티는 것도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미 노인이 가장 가난한 나라다. 2016년 한국의 노인 소득 빈곤율(중위소득 50% 미만의 소득으로 생계유지)은 43.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MIT 캠퍼스에서 중앙일보 취재진과 만난 머튼 교수는 약속한 인터뷰 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넘게 은퇴 재무 설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인터뷰 전날 미리 자신의 논문과 파워포인트(PPT) 발표 자료를 e메일로 보낼 만큼 그는 인구 고령화 문제에 대한 각별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신개념 채권인 ‘셀피’(SeLFIES·Standard of Living Indexed Forward-starting Income-only Securities)를 고안하기도 했다. 보통의 채권과 다르게 셀피 채권은 20년·30년·40년 후부터 이자가 지급되는 노후 대비 전용 금융 상품이다.

은퇴를 준비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은퇴 준비에 앞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부분 노후를 준비하려면 젊을 때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모아 자산을 최대한 축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사실 ‘무계획’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얼마의 액수를 언제까지 벌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퇴할 경우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고정수입이 사라지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상황일듯싶다.
“그렇다. 그렇다면 은퇴를 위한 재테크의 가장 큰 목표는 ‘은퇴 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작정 대단한 부자가 되겠다는 허황한 생각을 버리고 현실적으로 계획을 촘촘하게 세워야 한다. 무리한 투자로 추가적인 리스크에 노출될 필요는 없다.”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나.
“은퇴 후 원하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소득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 정하는 게 은퇴 준비의 첫걸음이다. 예를 들어, 현재 연 소득이 8000만원이고 은퇴 후 희망 소득이 현재의 70% 수준이라고 하자. 퇴직 후 필요한 연금은 연 5600만원이다.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으로 일정액을 충당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투자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그 목표를 위해 얼마나 저축할 것인지, 위험자산인 주식 투자 비중은 얼마나 늘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주식·파생상품 비중이 큰 ‘위험 감수형’과 채권 위주의 ‘위험 회피형’ 중 어떤 투자법을 추천하나.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사람마다 자산 축적 속도와 성향이 천차만별이고, 개인별로 시기마다 또 다르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이 호황이면, 공격투자형이 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면 위험회피형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투자 성향이다. 투자자들은 ‘중요한 정보’가 아닌 ‘의미 있는 정보’를 얻어야 한다. 자동차엔진의 압축비율은 연비를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이지만, 이걸 딜러가 고객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듯,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을 몇 대 몇 비율로 나눠야 하는지도 개인에게는 의미 없는 정보에 불과하다.”
투자자는 어떤 정보를 알아야 하나.
“내 현재 소득과 은퇴 예상 시기, 내가 원하는 목표소득, 목표소득을 얻기 위해선 ‘얼마를 저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계산, ‘달성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이 유용한 정보다. 이를 바탕으로 더 저축할 것인지 아니면 목표 소득을 낮출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이후 금융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을 추천한다.”
은퇴 자금을 굴리는 경우라면,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은 채권형이 낫지 않을까.
“마법사가 아닌 이상 안전한 국채에만 투자해 높은 수익을 내는 방법은 없다. 선진국 대부분이 제로금리,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들어선 지금은 더욱 그렇다. 앞으로 리스크를 지지 않고 수익을 내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많은 한국인은 자녀를 뒷바라지하느라 노후 대비의 중요성을 알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한국에는 주택연금(사는 주택을 담보로 매월 일정액을 연금 형식으로 받는 대출)이 있지 않나. 주택연금은 은퇴자에게 축복이다. 이를 은퇴자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면 더 좋은 제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
저금리 기조는 얼마나 갈까.
“최근 국제 금융시장은 불확실성이 크다. 얼마 전만 해도 양적 완화(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를 종료하면, 금리가 뛸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당분간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저금리 환경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하면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제로 금리’ 시대가 올까.
“선진국의 선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금리의 향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에 투자자가 몰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안전 자산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다. 기본적으로 채권은 기관 투자자가 안전한 자산으로 꼭 보유할 수밖에 없는 자산이다. 채권 금리가 마이너스라고 해도 앞으로 금리가 더 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차익 투자가 가능하다.”
핀테크 산업은 어떻게 전망하나.
“핀테크 산업이 활성화되려면 당국·기업·고객 간의 신뢰가 형성되어야 한다. 미국 식품의약품청(FDA)의 의약품 시판 허가 과정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지만, 그들이 승인했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이 돼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금융 규제 당국도 신뢰수준을 제대로 높여야 한다.”

파생상품 가치측정 ‘블랙-숄스’ 모델로 1997년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 헤지펀드 LTCM 세워 큰 돈 벌다 98년 파산…‘천재들의 실패’ 오명

로버트 머튼은 1944년 뉴욕 태생이다. 부친은 미 컬럼비아대의 저명한 사회학과 교수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이다. 아버지 머튼은 ‘일탈행동 이론’의 선구자로, 아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물려줬다. ‘수학 천재’였던 아들 머튼은 컬럼비아대에서 공학 수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도 수학을 계속 공부했다. 수학 외에도 주식 투자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머튼은 이후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꿨다.

그는 복잡한 경제 현상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머튼의 뛰어난 수학 능력에 반한 MIT는 그를 받아주었다. MIT 재학 당시 지도교수가 미국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 폴 새뮤얼슨이다.

이후 머튼은 수학을 금융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 끝에, ‘블랙-숄스 방정식’을 활용해 마이런 숄스 스탠퍼드대 교수와 파생상품 가치 측정 공식을 공동 개발해 전 세계 파생상품 시장을 급성장시켰다. 그 공로로 1997년 숄스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머튼은 1993년 당대의 천재들이 모인 헤지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를 창립해 큰 수익을 내기도 했다. 그는 30년 만기의 신규 발행 국채와 발행된 지 29년 6개월 된 국채의 아주 미묘한 금리 차이를 주목했다. 그리고 유동성이 높고 인기가 많은 신규 발행 채권이 이미 발행된 채권보다 금리가 다소 낮고 채권가격이 다소 비싼 것을 보고 차익 거래를 이용하는 데 원금의 약 30배나 되는 엄청난 레버리지(차입)를 사용했다. LTCM은 한때 연 41%라는 경이로운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아시아 외환위기로 촉발된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의 영향으로 1998년 파산했다. ‘천재들의 실패’ 였다.

노장이 된 머튼의 새로운 관심사는 은퇴 재무 설계다. 그는 ‘목표에 기초한 투자(goal-based investing)’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제 금융이론과 모델을 절대적으로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모델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투자의 참고사항일 뿐이라는 조언이다.

로버트 머튼(Robert C. Merton·75)

-1944년 미국 뉴욕 출생
-1966년 컬럼비아대 공학수학 학사
-1967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응용수학 석사
-197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경제학 박사
-1993년 헤지펀드 LTCM 공동창립
-1997년 마이런 숄스 교수와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
-201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슬론경영대학원 교수

케임브리지(미국)=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