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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석학 진단 "20년뒤 한국인들 노후 각자도생 빠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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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머튼 MIT 석좌교수가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초저금리 시대의 금융 혁신과 자산운용 전략'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로버트 머튼 MIT 석좌교수가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초저금리 시대의 금융 혁신과 자산운용 전략'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세계 경제석학 2020진단 ⑨로버트 머튼 MIT 경영대 교수

“앞으로 20~30년 뒤에는 더 많은 한국인이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빠질 것이다.”

199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Robert C. Merton·75)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의 최대 관심사는 ‘은퇴 재무 설계’다. 그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 사회를 유난히 걱정했다. 노년층의 빈곤과 젊은 층의 부담이 경제 성장률을 짓누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머튼 교수는 한국의 국민연금 적립금이 2040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60년 고갈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만 믿고 각자 스스로 노후 대비를 하지 않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그는 “근로자가 매달 납부하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지금의 9%에서 더 늘리기는 어렵고, 정부의 보조금을 임시방편으로 삼아 버티는 것도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미 노인이 가장 가난한 나라다. 2016년 한국의 노인 소득 빈곤율(중위소득 50% 미만의 소득으로 생계유지)은 43.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MIT 캠퍼스에서 중앙일보 취재진과 만난 머튼 교수는 약속한 인터뷰 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넘게 은퇴 재무 설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인터뷰 전날 미리 자신의 논문과 파워포인트(PPT) 발표 자료를 이메일로 보낼 만큼 그는 인구 고령화 문제에 대한 각별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신개념 채권인 '셀피'(SeLFIES·Standard of Living Indexed Forward-starting Income-only Securities)를 고안하기도 했다. 보통의 채권이 발행 후 3개월 또는 6개월 이후부터 이자가 지급되는 것과 다르게 셀피 채권은 20년·30년·40년 후부터 이자가 지급되는 노후 대비 전용 금융 상품이다.

은퇴를 준비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은퇴 준비에 앞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부분 노후를 준비하려면 젊을 때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모아 자산을 최대한 축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사실 ‘무계획’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얼마의 액수를 언제까지 벌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퇴할 경우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고정수입이 사라지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상황일듯 싶다.  
“그렇다. 그렇다면 은퇴를 위한 재테크의 가장 큰 목표는 ‘은퇴 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작정 대단한 부자가 되겠다는 허황한 생각을 버리고 현실적으로 계획을 촘촘하게 세워야 한다. 무리한 투자로 추가적인 리스크에 노출될 필요는 없다.”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나.  
“은퇴 후 원하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소득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 정하는 게 은퇴 준비의 첫걸음이다. 예를 들어, 현재 연 소득이 8000만원이고 은퇴 후 희망 소득이 현재의 70% 수준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퇴직 후 필요한 연금은 연 5600만원이다.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으로 일정액을 충당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투자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그 목표를 위해 얼마나 저축할 것인지, 위험자산인 주식 투자 비중은 얼마나 늘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주식·파생상품 비중이 큰 ‘위험 감수형’과 채권 위주의 ‘위험 회피형’ 중 어떤 투자법을 추천하나.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사람마다 자산 축적 속도와 성향이 천차만별이고, 개인별로 시기마다 또 다르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이 호황이면, 공격투자형이 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면 위험회피형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투자 성향이다. 투자자들은 ‘중요한 정보’가 아닌 ‘의미 있는 정보’를 얻어야 한다. 자동차엔진의 압축비율은 연비를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이지만, 이걸 딜러가 고객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듯,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을 몇 대 몇 비율로 나눠야 하는지도 개인에게는 의미 없는 정보에 불과하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지출액.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지출액.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러면 투자자는 어떤 정보를 알아야 하나.  
“내 현재 소득과 은퇴 예상 시기, 내가 원하는 목표소득, 목표소득을 얻기 위해선 ‘얼마를 저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계산, ‘달성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이 유용한 정보다. 이를 바탕으로 더 저축할 것인지 아니면 목표 소득을 낮출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이후 금융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도 은퇴 자금을 굴리는 경우라면,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은 채권형이 낫지 않을까. 
“마법사가 아닌 이상 안전한 국채에만 투자해 높은 수익을 거두는 방법은 없다. 선진국 대부분이 제로금리,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들어선 지금은 더욱 그렇다. 앞으로 리스크를 지지 않고 수익을 내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나.  
“리스크를 관리하려면 분산투자·헤징(Hedging)·금융보험 등 세 가지를 조합해야 한다. 기관투자자는 분산투자와 헤징은 잘하지만, 금융보험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금융보험은 생명보험 등이 아니라 '풋옵션'(put option)을 말한다. 풋옵션은 주식·채권을 미리 정한 가격에 되팔 수 있는 권리다. 투자자는 장래에 주식 혹은 채권가격이 내려가면 이익을 볼 수 있고 올라도 프리미엄만 포기하면 되기 때문에 손해는 한정적이다. 다만, 금융보험을 통한 리스크 관리가 가능하게 하려면 풋옵션을 사고팔 수 있는 투명한 시장이 있어야 하고, 거래 규모도 커야 한다”
풋옵션 활용은 ‘목표한 수익만 달성’하라는 조언과 일맥상통한 것 같다.  
“그렇다. 목표로 정한 수익까지만 추구하고 초과 수익률은 추구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100달러의 수익을 목표로 했다면 100달러까지만 벌고, 그 이상의 이익은 포기해야 한다. 연기금 등 목표수익이 확실한 기관이라면 고수익을 위해 리스크를 높이지 말고 목표수익을 위한 리스크만 감수해야 한다. 목표 없이 무조건 높은 수익률에 연연하며 불필요한 리스크를 감내하는 것은 독이 될 수 있다. 금융보험에 가입하면 목표수익을 초과하는 이익을 얻기는 힘들지만, 목표수익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
많은 한국인은 자녀를 뒷바라지하느라 노후 대비의 중요성을 알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한국에는 주택연금(사는 주택을 담보로 매월 일정액을 연금 형식으로 받는 대출)이 있지 않나. 주택연금은 은퇴자에게 축복이다. 이를 은퇴자에게 맞게 제대로 설계하면 더 좋은 제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

은퇴 재테크를 화제로 한 석학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저금리 얘기로 이어졌다. 노후 대비로 자금을 굴리려 해도 저금리가 지속되면 어렵기 때문이다. 은퇴 재테크의 핵심이 바로 저금리 시대의 리스크 회피법이라는 게 머튼 교수의 조언이다.

전세계적 저금리 기조는 얼마나 갈 것으로 전망하나.  
“최근 국제 금융시장은 불확실성이 크다. 얼마 전만 해도 양적 완화(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를 종료하면, 금리가 솟구칠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당분간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저금리 환경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하면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서구 선진국처럼 ‘제로 금리’ 시대가 올까.
“선진국의 선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금리의 향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  
미국 국채처럼 마이너스 금리 채권에 투자자가 몰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안전 자산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다. 기본적으로 채권은 기관 투자자가 안전한 자산으로 꼭 보유할 수밖에 없는 자산이다. 채권 금리가 마이너스라고 해도 앞으로 금리가 더 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차익 투자가 가능하다.”

케임브리지(미국)=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로버트 머튼

194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미 컬럼비아대의 저명한 사회학과 교수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이다. 아버지 머튼은 ‘일탈행동 이론’의 선구자로, 아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물려줬다. ‘수학 천재’였던 아들 머튼은 컬럼비아대에서 공학 수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도 수학을 계속 공부했다. 수학 외에도 주식 투자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머튼은 이후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꿨다.

그는 복잡한 경제 현상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뛰어난 수학 능력에 반한 MIT는 그를 받아주었다. MIT 재학 당시 지도교수가 미국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 폴 새뮤얼슨이다.

이후 머튼은 수학을 금융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 끝에, ‘블랙-숄스 방정식’을 활용해 마이런 숄스 스탠퍼드대 교수와 파생상품 가치 측정 공식을 공동 개발해 전 세계 파생상품 시장을 급성장시켰다. 그 공로로 1997년 숄스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머튼은 1993년 당대의 천재들이 모인 헤지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를 창립해 큰 수익을 내기도 했다. 그는 30년 만기의 신규 발행 국채와 발행된 지 29년 6개월 된 국채의 아주 미묘한 금리 차이를 주목했다. 그리고 유동성이 높고 인기가 많은 신규 발행 채권이 이미 발행된 채권보다 금리가 다소 낮고 채권가격이 다소 비싼 것을 보고 차익 거래를 이용하는 데 원금의 약 30배나 되는 엄청난 레버리지(차입)를 사용했다. LTCM는 한때 연 41%라는 경이로운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아시아 외환위기로 촉발된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의 영향으로 1988년 파산했다. ‘천재들의 실패’ 였다.

노장이 된 머튼의 새로운 관심사는 은퇴 재무 설계다. 그는 ‘목표에 기초한 투자(goal-based investing)’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제 금융 이론과 모델을 절대적으로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모델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투자의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조언이다.

약력

1944년 미국 뉴욕 출생
1966년 컬럼비아대 공학수학 학사
1967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응용수학 석사
197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경제학 박사
1993년 헤지펀드 LTCM 공동창립
1997년 마이런 숄스 교수와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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