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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세계에 통한 한국어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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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방탄과 기생충의 진짜 의미

7년간 활동을 집대성한 새 앨범 ‘맵 오브 더 솔:7’으로 영미 차트 동시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호평도 잇따른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7년간 활동을 집대성한 새 앨범 ‘맵 오브 더 솔:7’으로 영미 차트 동시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호평도 잇따른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방탄소년단이 또 일을 냈다. 공식 발표 전이지만 새 앨범 ‘맵 오브 더 솔(Map of the Soul):7’으로 영미 차트 동시 석권을 예약했다. 미국 빌보드와 영국 오피셜 차트 동시 1위는 지난해 ‘맵 오브 더 솔:페르소나’에 이어 두 번째다. 특히 빌보드에서 2년 안에 4연속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비틀스 이후 처음, 대기록이다. 당연히 비(非)영어권 최초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에 이은 굿 뉴스다.

새 앨범 영미차트 석권 BTS #오스카 역사 다시 쓴 기생충 #한류의 진화, 성과 넘어서 #서구 주류문화 자체를 바꿔

시장·팬덤뿐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뜨겁다. 영국 인디펜던트와 음악전문지 NME, 미국 음악 매체 롤링스톤은 별 5개에 4개의 높은 점수를 줬다. “방탄이 이룬 성과를 환상적으로 압축한 앨범”(LA타임스), “방탄을 좋아한 것이 최고의 선택임을 증명한다” (NME)는 평이 나왔다. 방탄이 유일하게 받지 못한 그래미에 한층 다가갔다는 평도 나온다. 대중음악평론가 랜디 서는 “주류 시장에서도 비평적으로 찬사받은 앨범이 될 것”이라며 “방탄이 발매한 모든 음반 중 가장 그래미 후보지명 가능성이 높다”고 평했다.

월드 스타로서의 존재감은 미국 토크쇼에도 이어졌다. 미국 지상파TV 토크쇼의 ‘방탄 모시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흥미로운 변화가 눈에 띄었다. 과거처럼 리더 RM이 대표주자로 영어 인터뷰를 도맡는 것과 달리, 멤버들이 한국어로 말하면 영어 자막을 달았다(NBC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 MTV ‘프레시 아웃’, 빌보드 유튜브 채널). 방탄이라면 자막을 읽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겠단 뜻이다. 미국 시청자들의 유난한 자막 기피는 봉준호 감독의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봉 감독은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면서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영화라는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사실 아미(방탄 팬클럽)가 된다는 것은, 방탄의 노래를 통해 한국어라는 낯선 언어를 알게 되는 것이며, 소수 언어를 구사하는 마이너리티의 경험을 체화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BTS와 아미 컬처』를 쓴 이지행 박사는 “1세계 시민으로서 우월한 문화적 지위를 놓친 적 없는 사람들이 방탄의 열혈 팬이 됐을 때 한국어를 잘 몰라 겪는 역지사지의 순간들은, 세계 속 자신의 위치와 타문화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이처럼 마이너리티의 위치를 체험해보는 것이, 변방에서 온 방탄의 소수자성과 언더독 신화에 열광하게 하는 비결이란 얘기다. 문화적 다양성, 다원주의를 ‘쿨’하게 받아들이는 서구 밀레니얼 세대의 감수성도 이에 한몫했다.

해외 아미들은 한국어 가사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열공’할 뿐 아니라, 팬덤 안에 자생적인 언어체계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가고 있다. 아미들 끼리 쓰는 ‘아민정음(아미+훈민정음)’이 그것이다〈부속기사 참조〉. 한국적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번역 대신 한국어 발음을 영어 알파벳으로 옮겨 쓰는, 일종의 ‘덕질용 언어’다. 가령 한국 아이돌 시스템의 ‘연습생’은 ‘trainee’ 대신 ‘yeonseupseng’이라고 쓴다. ‘noonchi(눈치)’ ‘sseomtada(썸타다)’ ‘aegyo(애교)’ 같은 단어도 있다. 아이돌을 포함해 한국인의 사회 생활에 치명적인 ‘눈치가 없다’는 ‘lack of noonchi’ 또는 ‘no noonchi’ ‘ain’t got noonchi’라고 쓴다. 팬들을 위한 아민정음 입문서나 유튜브 채널도 인기다. 한국 ‘kkondae(꼰대)’들은 잘 몰라도 아미들은 익숙한 신조어들이 많다.

#방탄과 ‘기생충’의 교집합

92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기록한 영화 ‘기생충’ 팀. [뉴스1]

92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기록한 영화 ‘기생충’ 팀. [뉴스1]

방탄과 ‘기생충’의 공통점은 온전히 한국어로 이뤄진 콘텐츠의 성공이란 점이다. 한국의 특수한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와 노랫말로 전 세계가 공감하는 보편적 주제의식을 끌어냈다. 언어·국적·인종의 장벽을 넘는 ‘초국적성’의 획득이다. 둘 다 한류의 역사를 새로 썼고, 동시에 서구 주류 대중문화의 역사도 새로 썼다. 한국영화 최초로 아카데미를 거머쥔 ‘기생충’이 지난 92년 동안 비영어 영화에 한 번도 작품상을 준 적 없는 오스카의 보수적 역사를 바꾼 것처럼 말이다.

방탄의 리더 RM은 이번 앨범 발매 기념 온라인 간담회에서 자신들의 인기비결을 묻자 “시대성을 가장 잘 나타낸 아티스트가 가장 많이 사랑받는 것 같다. 우리가 풀어낸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 범세계성을 띠게 된 것 같다”고 답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으며, 마틴 스코세이지의 명언을 인용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한 것과 겹쳐진다. RM은 앞서 미국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도 “1등을 하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이나 진실성을 바꾸고 싶지 않다. 우리가 갑자기 영어로만 노래하고 모든 것을 다 바꾼다면 그건 방탄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최근 『한국인 이야기 - 너 어디서 왔니』를 펴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방탄과 ‘기생충’의 선전을 “한국어의 승리” “한국어의 성공”이라고 해석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글로벌 스탠더드인 영어가 아니어도 우리말이 세계에 통했다. 한국말 배워야 BTS를, 랩을 제대로 따라 할 수 있고 ‘기생충’도 한국말을 배워야 진짜 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 SNS에 패러디 열풍이 인) ‘제시카 송’도 한류가 강해지니까 그게 뭐가 됐든 한국말을 많이 배운다. 그게 언어의 승리다”라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는 글로벌 플랫폼과 오디언스에 주목한다.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어 문화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싶어하는 글로벌한 욕망을 갖춘 대중이 등장했고, 국가라는 경계가 상당 부분 깨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내수시장이 작기 때문에 항상 로컬을 하면서도 글로벌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해외 시장 트렌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식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오스카 무대에 올라 작품상을 받는 아시아인들이라니, 얼마나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면인가.”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원작 소설가 케빈 콴이 ‘기생충’ 수상 직후 자신의 SNS에 올린 소감이다. 물론 아직도 이들의 성취를 일회성으로 깎아내리며 냉소하는 이들도 많지만 기울어진 문화의 추를 뒤엎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방탄과 ‘기생충’의 성과가 기존 한류와 달리 보다 본질적인 변화인 이유다. 그들은 한류만 진화시킨 게 아니다. 다원주의·다양성의 바람에 올라탄 서구 주류 문화의 세계사적 변화도 이끌어내고 있다.

아미들이 만든 덕질언어 '아민정음'이란

K팝 팬들을 위한 ‘아민정음’ 가이드 북의 하나인 『K pop dictionary』 표지.

K팝 팬들을 위한 ‘아민정음’ 가이드 북의 하나인 『K pop dictionary』 표지.

‘아민정음(아미+훈민정음)’이란 해외 아미들이 만든, 아미들만의 언어다. ‘kibun(기분)’ ‘yeonseupseng(연습생)’ ‘tteedonggab(띠동갑)’ 처럼 한국어 발음을 영어 알파벳으로 옮겨 쓴다. 직역이 쉽지 않은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다. 아미나 K팝 팬들이 SNS에서 댓글을 달거나 뉴스를 공유할 때 쓴다. 이런 아민정음을 모은 『K-POP DICTIONARY』도 있다. ‘아미들을 위한 한국어 가이드 사전’이다. 방탄이 미국 프로에 출연해 아민정음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아민정음에는 K팝 스타들이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한국 아이돌 문화와 관련된 말, 한류 드라마나 예능에 자주 나오는 말들이 포함된다. 뉴욕타임스가 “행복과 성공에 이르는 한국인의 비밀”이라고 소개한 ‘noonchi(눈치)’,  아이돌에게 강요되는 ‘aegyo(애교)’, 지난해 9월 BBC가 ‘오늘의 단어’로 선정한 ‘kkondae(꼰대)’ 등이다. 콘서트에서 관객 반응을 유도할 때 쓰는 ‘so-ri jil-luh(소리질러·make some noise), 귀여움을 담당하는 최연소 멤버를 가리키는 ‘maknae (막내)’, ‘bap moon-na(밥 문나)’ 같은 사투리도 있다.

원래 없던 의미가 추가되기도 한다. ‘nugu(누구)’는 누구인지 잘 모르는 ‘듣보잡’을 뜻한다. ‘he is a nugu’란 ‘웬 듣보잡’이라는 뜻이니 조심해서 써야 한다. 최근 추가된 아민정음으로는 ‘sajaegi(사재기)’가 있다. K팝 팬덤이 최근 한국 음원 시장의 사재기 논란까지 줄줄 꿰고 있다는 뜻이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