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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 못막는다, 전략 바꾸자" 싱가포르 진정시킨 '총리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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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상황이 변하는 것에 맞춰 즉각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겠다"고 설명하는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싱가포르 총리실 유튜브 캡쳐]

지난 8일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상황이 변하는 것에 맞춰 즉각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겠다"고 설명하는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싱가포르 총리실 유튜브 캡쳐]

“지금까지 대부분의 중국 유입 환자는 추적 가능했지만, 지난 며칠간 감염원을 알 수 없는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지난 8일 싱가포르의 리셴룽(李顯龍) 총리가 직접 출연한 영상 담화문의 일부다. 영어·중국어·말레이어 등 3개어로 제작된 9분 분량의 영상에서 그는 싱가포르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지역사회 감염 단계에 들어섰음을 시민들에게 솔직하게 밝혔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으로 본 양국 대응

당시 싱가포르는 일부 시민이 생필품 사재기에 나서는 등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하루 전인 7일 확진자 33명 중 감염원을 알 수 없는 환자 2명이 나오자 경보 단계가 '주황'으로 격상됐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확산 못 막는다" 인정, 계획·행동수칙 제시

지난 7일 싱가포르가 질병대응단계를 '주황'으로 격상하자, 불안해진 시민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면서 텅 빈 매대. 그러나 리셴룽 총리가 대국민 담화에 나서 상황을 설명한 뒤 사재기는 사라졌다. [EPA=연합뉴스]

지난 7일 싱가포르가 질병대응단계를 '주황'으로 격상하자, 불안해진 시민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면서 텅 빈 매대. 그러나 리셴룽 총리가 대국민 담화에 나서 상황을 설명한 뒤 사재기는 사라졌다. [EPA=연합뉴스]

담화에서 리셴룽 총리는 "확산을 막기가 더는 어렵다"고 숨김없이 밝혔다. 동시에 향후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환자가 늘면 전략을 바꿔야 한다”“경증 환자는 자가격리하고 의료기관은 취약 환자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손을 자주 씻고 하루 두 번 체온을 재라’ 등과 같은 행동수칙도 제시했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도 했다. 시민에게 '불안해하지 마라'고 하는 대신 이해와 공감의 메시지를 담았다. 아울러 “시민 봉사자와 의료진이 영감을 주고 있다”라고 격려했다. 다음날 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생필품을 사려는 인파로 붐비던 상점들이 담화 이후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고 전했다.

‘9분 담화’로 동요 막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그래픽=신재민 기자

‘9분 담화’로 동요 막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그래픽=신재민 기자

인구가 600만명이 채 안 되는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26일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91명으로, 중국·한국·이탈리아·일본·이란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다.

하지만 총리와 장관의 소통 노력으로 혼란을 줄였다는 면에선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공중 보건 분야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최재욱 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리셴룽 총리의 담화를 “위기 상황 속 커뮤니케이션의 모범 사례”라고 평가했다.

2015년 메르스 당시 보건복지부 부대변인을 지냈던 박기수 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도 “싱가포르 당국은 메르스 이후 한국 상황을 벤치마킹할 만큼 위기관리 대응에 노력해왔다. 코로나19 상황에도 아주 매끄럽게 대처했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 정부와 방역당국의 대국민 소통엔 전문가들은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확산 초기부터 대국민 메시지가 뒤섞이고, 뒤집혔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근거 없는 낙관론'만, 불신 자초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은 18일 브리핑에서도 "지역사회 감염은 아직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하루 사이에 31명 증가한 20일에서야 "지역사회 감염 초기 단계"라고 밝혔다. [뉴스1]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은 18일 브리핑에서도 "지역사회 감염은 아직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하루 사이에 31명 증가한 20일에서야 "지역사회 감염 초기 단계"라고 밝혔다. [뉴스1]

정부는 29·30번 확진자의 감염 경로를 확인 못 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 감염 단계는 아니다"라고 거듭 부인했다. 대구 신천지 교회에서 예배를 본 31번울 시작으로 확진자가 급증한 지난 20일 처음 '지역사회 감염 초기 단계'란 표현을 사용했다.

최재욱 교수는 “한국의 초기 대응에서 패인은 이런 ‘근거 없는 낙관론’"이라고 지적했다.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당국의 공식 발표 등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면 사회적 불신이 한층 커지기 마련인데, 정부와 방역당국이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는 설명이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관련한 가짜뉴스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모습.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는 동안 정부가 '가짜뉴스 처벌' 방침을 내놓자, 경찰, 검찰, 지자체에서는 일제히 '가짜뉴스 단속'에.나섰다. [사진 서울지방경찰청]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관련한 가짜뉴스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모습.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는 동안 정부가 '가짜뉴스 처벌' 방침을 내놓자, 경찰, 검찰, 지자체에서는 일제히 '가짜뉴스 단속'에.나섰다. [사진 서울지방경찰청]

시민을 향한 메시지는 불친절했다. 특히 ‘자가격리 위반 시 형사처벌’ 등의 발언은 잠재적 환자에 ‘처벌 대상’이라는 낙인을 찍어 환자 발견을 더디게 했다.

단국대 인문사회의학교실의 박형욱 교수는 “막연하게 처벌을 운운하는 대신 '검사에 응하지 않으면 강제로 한다'는 식으로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행동을 제시하는 게 도움 된다”며 “정부가 취할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야 검사·자가격리의 중요성을 대중에 인식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모르는 정보에 섣불리 '아니다' 메시지

24일 대전 서구 월평동 한 대형마트 내 마스크 매대에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연합뉴스]

24일 대전 서구 월평동 한 대형마트 내 마스크 매대에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연합뉴스]

코로나19는 신종 감염병인데다 진원지인 중국에서 나오는 정보가 부족해, 확산 초기 불확실한 정보가 많은 게 사실이었다. 증상·중증도·감염력에 대한 연구 결과가 엇갈리는 상황이었으나 정부는 "무증상 감염은 없다""지역사회 감염 위험이 없다"고 거듭 밝혔다.

하지만 무증상 감염, 지역사회 감염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정부와 방역당국에 대한 신뢰도 그만큼 떨어졌다. 최 교수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게 위기 상황 속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라며 "당시 해외 논문이나 보도를 통해 해당 정보를 알고 있던 대중이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혼돈을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방역 당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 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방역 당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 했다. [뉴스1]

대통령의 발언도 현장과 동떨어졌다. 지난달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를 믿고 과도한 불안을 갖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후 확진자가 계속 늘었다. 이어 28일 대통령은 “과할 정도의 선제적 조치”를 공언했지만, 후베이성에 대한 입국 제한은 엿새가 지난 뒤(2월 3일)에야 이뤄졌다.

지난 13일 대기업 총수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은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확진자는 걷잡을 수 없이 불고 있다. 25일엔 당정청이 대구·경북에 '최대한의 봉쇄조치를 시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가 청와대 등이 나서 "지역적인 봉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는 '촌극'도 빚어졌다.

“근거 없다"며 국민의 불안감 무시

박원순 서울시장이 2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대책을 발표하는 모습. SNS를 통해 확진자 정보가 공유되고 지자체별로 확진자 등에 대한 정보를 질본보다 먼저 내놓으면서, 초기 매일 두 번 정해진 시간에 확진자수 통계를 발표하던 질본의 방식은 시의성을 잃었다. 이후 전략을 수정해, 최근엔 질본도 확진자수 집계가 업데이트 되는 대로 알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뉴스1]

박원순 서울시장이 2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대책을 발표하는 모습. SNS를 통해 확진자 정보가 공유되고 지자체별로 확진자 등에 대한 정보를 질본보다 먼저 내놓으면서, 초기 매일 두 번 정해진 시간에 확진자수 통계를 발표하던 질본의 방식은 시의성을 잃었다. 이후 전략을 수정해, 최근엔 질본도 확진자수 집계가 업데이트 되는 대로 알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뉴스1]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정보 공개가 늦으면, SNS 등으로 퍼지는 정보에 밀려 정부는 신뢰를 잃기 마련이다. 확산 초기 정부는 지역 감염 통계를 하루 2번 브리핑에서 알렸지만 불안한 시민들은 정보에 목말라했고, SNS 등을 통해 유포되는 정보 등에 의지하게 됐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범정부대책회의를 마친 후 결과를 브리핑 하는 모습. 박능후 장관은 매 브리핑마다 '정부를 믿어달라' '과도한 불안을 갖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21일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는 조치를 묻는 "방충망을 열어놓고 모기약을 치는 격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는 질문에 "겨울이라 모기가 없다"고 농담조로 대답한 점이 논란이 됐다. [연합뉴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범정부대책회의를 마친 후 결과를 브리핑 하는 모습. 박능후 장관은 매 브리핑마다 '정부를 믿어달라' '과도한 불안을 갖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21일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는 조치를 묻는 "방충망을 열어놓고 모기약을 치는 격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는 질문에 "겨울이라 모기가 없다"고 농담조로 대답한 점이 논란이 됐다. [연합뉴스]

싱가포르와 달리 시민에 대한 공감, 격려의 메시지도 부족했다. 질병관리본부·복지부·중앙사고대책본부 브리핑에서 매번 등장한 말은 “믿어달라”“과도한 불안을 갖지 말라”였다.

최 교수는“이를 듣는 국민 입장에선 정부가 '국민이 근거 없이 불안해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국민의 불안을 무시해선 안 됐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신종 감염병 등 국가 위기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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