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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판·검사 못 믿으면 시민이 기소·판결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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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수사·기소 분리론’의 바닥을 보다

(과천=뉴스1) 이광호 기자 =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11일 오후 경기도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공소장 공개 기준과 절차에 대해 말하고 있다.2020.2.11/뉴스1

(과천=뉴스1) 이광호 기자 =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11일 오후 경기도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공소장 공개 기준과 절차에 대해 말하고 있다.2020.2.11/뉴스1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촉발했다.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수사·기소 분리론을 꺼냈다. 기소를 담당하는 검사를 따로 둘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수사만 하고 기소는 못 하는 검사가 생긴다. 공소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검사? 검찰에서는 “그게 검사냐?”고 따진다. 사법경찰관과 다른 게 뭐가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추미애 장관이 던진 ‘공소권 제한’ #의도 수상하지만 공론의 소재 돼 #사법 신뢰가 붕괴한 참담한 현실 #시민 참여의 소추·재판도 선택지

추 장관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추가 기소나 향후 현 정권을 향한 검찰 수사를 막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고 의심받는다. 학계와 법조계 일각에는 추 장관 발언의 ‘타이밍’에는 문제가 있으나 검사의 공소권 제한은 검토 필요성이 있는 사안이라고 동조하는 이도 있다. 추 장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사·기소 분리론’은 공론의 장에 던져졌다. 21일로 예정됐던 추 장관과 전국 검사장들의 대화가 무산돼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논쟁적 사안이다. 이 논란은 어디로 갈까? 결국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이런 의문을 품고 전문가들을 만났다.

“기소 배심제가 낫다”

이완규 변호사는 “검사를 못 믿겠다면 차라리 기소 배심제를 도입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머지않아 그걸 얘기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 출신인 이 변호사는 형사소송제도 전문가다. 기소 배심제는 기소 단계에서 시민들이 참여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수사 내용을 알려주고 기소 필요성을 주장한 뒤 동의를 얻어야 기소할 수 있다.

이 변호사의 주장은 이렇다. 검사를 못 믿어서 기소를 담당하는 검사를 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기소 담당 검사는 어떻게 믿나? → 그 기소를 담당하는 검사를 견제하는 검사를 둬야 한다고 하지 않겠나? → 검사 위에 다른 검사를 두어도 검찰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는 어렵다. → 결국 검찰 밖의 통제 장치를 고려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 변호사는 대화 중에 “관료 사법의 틀이 깨졌다”고 말했다. ‘관료 사법’은 국가가 똑똑한 사람 중에서 판·검사를 뽑아 그들에게 소추(기소)와 재판을 맡기는 제도다. ‘엘리트 사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국가에서 중간층 이상의 지위와 생활을 보장하는 판·검사들이 공정하고 올바르게 기소하고 재판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린 제도다.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 그 믿음이 급속도로 붕괴했다. 거의 모든 주요 사건(국민이 주목하는 사건)은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한편에서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의의 칼을 휘둘렀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에선 적폐 세력의 반격으로 여긴다. 일반 사건의 결과는 수임료 비싼 변호사와 검찰의 협잡이거나, 정치권력과 검찰의 유착 아니면 충돌로 이해한다. 지금 윤 총장을 정의의 사도로 생각하는 시민 중 상당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권력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판단은 언제든 다시 뒤바뀔 수 있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중 하나라도 반대하는 이는 검찰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사법 불신의 끝은 배심제”

이완규(左), 김용담(右). [연합뉴스]

이완규(左), 김용담(右). [연합뉴스]

법원을 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큰 사건의 판결이 나면 재판을 맡은 판사의 성향을 본다. 아니, 판결 전부터 그것을 근거로 삼아 예측한다. ○○○연구회 소속이냐, 고향이 어디냐, 사법부에서 주류·비주류 중 어느 쪽에 속하냐를 따진다. 죄를 보지 않고 판사를 본다. 판결 뒤에는 시민들이 두 패로 갈려 싸우기 일쑤다.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믿음은 헌법 속에 있는 박제가 됐다.

김용담 전 대법관은 “사법의 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배심제 재판 도입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국민이 판사를 믿지 않으니 별도리가 없지 않으냐”고 했다. 1년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국민이 판사의 양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런 기대를 포기한 듯했다. “판사들이 정치계로 잇따라 뛰어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계속 재판에 대한 신뢰를 말할 수 있겠느냐”며 한탄했다.

배심제는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법원에 부분적으로 도입됐다. ‘부분적’이라 함은 합의부 재판에서, 피고인이 동의할 경우에만 이뤄지는 데다가 판결에도 ‘권고적 효력’만 미치기 때문이다. 배심원 평결에서는 무죄 판단이 나와도 판사가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김 전 대법관은 “우리 헌법에 재판은 판사가 하게 돼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배심제 도입은 개헌 사항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 법원이 배심제 도입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영국·미국의 배심제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시민과 법관이 함께 판단하는 ‘참심제’ 도입도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일본 등에서 참심제가 운용되고 있다.

‘관료 사법’의 중대 위기

판·검사를 믿지 못하면 결국 갈 길은 뻔하다. 시민이 기소와 재판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시민이 더 정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환경미화원을 못 믿으면 주민이 직접 청소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완규 변호사는 “미국 배심제 재판에는 12명의 보통 시민이 유죄라고 하면 억울해도 승복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깔렸다”고 설명했다.

검찰 수사에 대한 기소 배심제는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 박성재 변호사(전 서울고검장)는 “배심원들이 몇 달에 걸쳐 검찰이 수사한 내용을 세세히 알기 어렵다. 검사가 제시하는 자료와 그의 주장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그는 “검찰에 주요 사건의 기록을 검토하고 의견을 내는 팀을 만들어 수사와 기소를 스크린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게 차라리 더 낫다”고 말했다. 김웅 전 검사는 “지금의 검찰권 남용 논란은 대부분 검찰의 인지·직접 수사와 관련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검사는 직접 수사하지 않고 경찰 등의 수사기관을 지휘·감독하고 기소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공소권 제한 논란도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관료 사법 체제가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법원·검찰 내부의 자중지란과 외부의 공격, 그리고 국민의 불신. 그 끝에 ‘이제는 시민이 기소하고 재판한다’는 카드도 놓여있다. 머지않아 눈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그림이다.

관료 사법 vs 시민 사법

1995년 미국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의 전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가운데). [중앙포토]

1995년 미국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의 전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가운데). [중앙포토]

국가가 정한 검사·판사가 소추와 판결을 담당하는 것을 ‘관료 사법’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에는 통상 지방 수령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지금은 사법시험에 합격하거나 법학전문대학원을 나와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법조인 중에서 선발한 판검사가 기소하고 유무죄를 판단한다. ‘시민 사법’은 소추와 재판에 시민이 참여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시민 사법의 대표적인 형태가 영국·미국 법원의 배심원제다. 국민 중에서 무작위로 뽑힌 배심원들이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한다. 멀리 아테네의 시민 재판에서 뿌리를 찾기도 하나, 영국에서 자리 잡은 제도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13세기에 작성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자유민은 동료 자유민들의 적법한 판결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감금·추방·몰수 등을 당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왕·군주·사제의 전횡에 따른 처벌을 막는다는 취지다.

한국에서 배심원제 논의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OJ 심슨 사건’이다. 전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전 미식축구 선수 심슨이 배심원들의 판단에 따라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거액의 수임료를 받은 변호사들이 담당 경찰관들의 과거 행적을 파헤치며 ‘인종차별’ 프레임으로 재판을 몰고 가 무죄 평결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배심원들의 판단을 어떻게 신뢰하느냐는 문제가 있지만, 자신의 선입견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보다는 시민이 더 믿을 만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