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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폐지가 뭐길래…수입 막는다고 '폐지 대란' 사라질까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보도위로 폐지줍는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가고 있다. [박해리 기자]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보도위로 폐지줍는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가고 있다. [박해리 기자]

지난 3일 민간 업체들의 폐지 수거 거부로 수도권 65개 아파트단지 쓰레기장이 폐지로 뒤덮일 위기에 몰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국으로의 국산 폐지 수출길이 막혀 폐지 값이 하락하자, 국내 폐지 수거 업체들의 채산성이 떨어진 것이 집단행동의 원인이었다. 환경부는 집단행동 2주째인 지난 17일 이들의 요구를 수용한 대책을 내놓으며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대책에는 국내 제지업체들이 국산 폐지를 우선 구매하도록 권고하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폐지는 수입 제한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는 시장 참여자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자유 무역국으로의 신뢰도를 훼손할 수 있는 내용까지 검토한다는 의사를 밝히고서야 급한 불이 꺼진 것이다.

폐지 수거 업체들, 왜 어렵나? 

물론 민간 폐지 수거 업체들의 경영 사정은 녹록지 않다. 우선 국산 폐지 수출량이 급격히 줄었다. 이렇다 보니 지난해 폐지 순수입량(수입량-수출량)은 106만9408t으로 한 해 전보다 31% 증가했다. 제지업체들이 해외로부터 폐지를 수입해 골판지 상자를 만들면, 사용 후 버려지는 상자는 수출되지 않고 국내에 쌓인다. 이 때문에 국산 폐지 가격은 계속 내려가는 구조다. 2018년 1㎏당 150원이었던 국내 폐지 값은 올해 들어 65원으로 떨어졌다. 같은 양을 팔아도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특히 많게는 50만~60만t 규모로 국산 폐지를 수입하던 중국이 올해까지 폐지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환경 규제를 시행하면 민간 폐지업체의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폐지 값 내렸는데 왜 안 팔리나 

국산 폐지의 가격이 내리면 제지업체들이 앞다퉈 값싼 폐지를 사서 쓰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국내 제지업체는 여전히 수입 폐지를 찾는다. 이들이 국내 폐지업계의 어려움을 모르지도 않는다. 제지업계로선 정부가 국산품 애용을 아무리 강조해도 수입 폐지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수입 폐지에는 값이 쌀뿐더러 은박지·비닐 등 이물질도 적다"며 "적은 원가로 더 많은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데도 이를 외면하고 국산 폐지를 쓰라는 정부 권고는 스스로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비합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규모의 경제로 가격·품질 경쟁력 높여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여론에 떠밀려 섣불리 시장 원칙에 반하는 대책을 내놓기 전에, 국산 폐지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영세한 규모로 난립한 폐지업체 간 인수·합병(M&A)이나 협동조합 설립 등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가격·품질 경쟁력을 높여야 국내 폐지업계의 장기적인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는 "당장의 상생을 명분으로 제지업계에 국산 폐지를 사들이라고 권고하고, 해외 수입 제한을 검토하는 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며 "정부는 시장가격을 신호로 사업자들이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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