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기금형, 자칫하면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꼴

중앙일보

입력 2020.02.22 14:00

[더,오래] 김성일의 퇴직연금 이야기(50)

'맥스웰 스캔들'의 영국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 회장. [중앙포토]

'맥스웰 스캔들'의 영국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 회장. [중앙포토]

퇴직연금은 2018년 말 기준 적립액이 190조원으로 가파르게 성장해 왔다. 2020년에는 200조원 돌파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적립금 증가가 양적 성장이라면, 수익성 향상은 질적 성장이랄 수 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맞는 질적 성장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래의 〈그림〉에서 보면 2018년 기준으로 3년 수익률 평균이 1.49%에 불과하다. 자신의 퇴직연금 적립금을 활용한 투자로 노후자산을 키워 나간다는 제도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다.

[그림] 2018년 이전 3년간 적립금 및 수익률.

[그림] 2018년 이전 3년간 적립금 및 수익률.

수익률이 저조한 이유는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 변동폭이 큰 탓도 있지만, 퇴직연금 적립금의 90% 이상이 원리금 보장상품에 집중된 것이 더 큰 원인으로 보인다. 원리금 보장상품 금리가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퇴직연금 감독 당국과 전문가들이 자산운용의 전문성을 통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기금형 퇴직연금제도의 도입에 대해 몇 년간 논의했지만 아직 법제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기금형은 사용자와 근로자가 기금운용 정책을 마련하고, 회사와 별도로 독립된 기금을 신탁형태로 운영하는 형태다. 기업의 재무나 인사 라인의 비전문가가 자기 책임회피를 위해 원리금 보장상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 수탁인의 책임 아래 장기적이고 유연한 운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기금형 제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맥스웰 스캔들’을 되돌아봄으로써 기금형 제도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보려 한다. 맥스웰 스캔들은 1991년 영국 맥스웰 그룹의 연기금 횡령사건을 말한다. 영국 연금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영국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이 이사회의 감시 감독이 배제된 독단적인 기금운용 끝에 1억 파운드에 달하는 연금 적립금을 몰래 유용하고, 당시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4억 파운드의 부도를 냈다.

영국의 퇴직연금은 기업 노사가 참여하는 신탁제도 형태인 기금형이다. 사용자가 적립한 퇴직연금 자산을 수탁자가 연금사업자에게 운용을 위탁하는 구조다. 소유와 운용이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수탁자는 연금자산의 독립적인 보유자로 퇴직연금기금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를 지고, 운용을 위탁받은 연금사업자는 근로자에 대한 충실의무를 가진다.

신탁법은 연금신탁의 수탁자 역할에 대해 규정짓고 있지 않으므로, 수탁자는 신탁약관에 따라 연금자산을 선관주의(선량한 관리자의 의무)에 따라 관리하게 된다. 선관주의란 채무자의 사회적·경제적인 지위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를 다 하는 의무다. 수탁인이 채무자가 되고, 위탁자인 근로자가 채권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이 선관주의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사건이 맥스웰 스캔들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용자 또는 이해관계인이 발행한 증권에의 투자는 금지되어 있으며, 사용자와 계열회사 및 지분법 적용사가 발행한 증권은 확정급여형 적립금 운용에는 전체자산의 5%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사진 Pexels]

현재 우리나라는 사용자 또는 이해관계인이 발행한 증권에의 투자는 금지되어 있으며, 사용자와 계열회사 및 지분법 적용사가 발행한 증권은 확정급여형 적립금 운용에는 전체자산의 5%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사진 Pexels]

1980년대 중반부터 맥스웰은 자신이 경영하는 미디어 그룹인 미러그룹의 퇴직연금기금 운용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미러그룹의 퇴직연금(MGPS)은 1987년 기준 4억 파운드의 자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MGPS의 수탁자는 사내 투자회사의 조언을 받아 투자 결정을 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 MGPS의 수탁자는 투자와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을 맥스웰이 지배하는 BIM에 넘긴 데 이어, 1988년 3월엔 모든 기업의 퇴직연금기금을 BIM이 수탁자로 있는 신탁기금 CIF로 이관한다.

문제는 맥스웰이 연금자산 운용의 지배구조를 장악한 후 퇴직연금기금으로 자사 주식을 매수했고, 은행 대출을 위해 퇴직연금 적립금을 담보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결국 신규 사업의 경영악화로 그룹 전체가 파산하고, 퇴직연금 가입자 3만 명에게 손실을 입혔다.

현재 우리나라는 기금형은 아니지만 퇴직연금 적립금이 유용되지 않도록 적립금 운용방법을 상당히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사용자 또는 이해관계인이 발행한 증권 투자는 금지돼 있으며, 사용자와 계열회사 및 지분법 적용사가 발행한 증권의 확정급여(DB)형 적립금 운용은 전체자산의 5%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현재 논의 중인 기금형에서 수탁법인은 신의성실 의무에 따라 독립적으로 퇴직연금기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용자와 근로자 대표가 선임하는 이사를 동수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사용자 독단적인 운용을 제한하고,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선량한 관리자 의무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아직은 근로자 보호 차원의 노력이 명확하고 실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근로자를 위한 제도가 마련된다고 해도 맥스웰 스캔들과 같이 신의성실의무가 지켜지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향후 기금형 도입이 근로자를 위한 제도가 되기 위해 근로자 대표만의 참여 그 이상의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투자의사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메커니즘의 확보일 것이다.

한국연금학회 퇴직연금 분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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