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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자툰 ‘구대동 존대이’ 선언하자 친대만계 인사들 환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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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4〉

문혁 시절 홍콩 좌파들은 해만 지면 집회를 열고 마오쩌둥 사상 강의를 경청했다. 1967년 위안랑 인근. [사진 김명호]

문혁 시절 홍콩 좌파들은 해만 지면 집회를 열고 마오쩌둥 사상 강의를 경청했다. 1967년 위안랑 인근. [사진 김명호]

신화통신 홍콩분사에는 통일전선(통전)의 고수들이 즐비했다. 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의 회고를 소개한다. “홍콩은 특수 지역이었다. 통전 공작도 내지(內地)와 달랐다. 누구를 만나건 체제 선전을 하지 않았다. 관점과 의식의 차이를 존중하며 거리를 좁혀갔다. 반대파와 대화를 나눌 때도 애국과 중화 민족, 조국통일을 화제로 삼으면 얼굴 붉힐 일이 없었다. 잔재주나 건성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한번 한 말은 꼭 지키고, 상대가 누구건 똑같이 대했다. 용인과 인내는 기본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되고 우리 의견에 동조했다. 없는 재주에 통전 공작 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예외도 있었다. 위자오치(余兆麒·여조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구대동 존소이’ 원래 방침 바꿔 #홍콩 내 골수 반공인사 회유 나서 #방송·영화계 거물 샤오이푸 초대 #본토 고향 방문 제의 1년 후 성사 #장쩌민 당시 상하이 시장 접대 소홀 #쉬자툰 “공항 결례 만회하라” 전화

위자오치 “가래침 만큼 공산당 싫다”

총리 취임을 앞둔 리펑과 쉬자툰(오른쪽)의 반가운 악수. 두 사람은 상극이었다. [사진 김명호]

총리 취임을 앞둔 리펑과 쉬자툰(오른쪽)의 반가운 악수. 두 사람은 상극이었다. [사진 김명호]

홍콩연합은행 이사회 의장 위자오치는 골수 반공주의자였다. 미시간대학을 마치고 황푸군관학교 교관과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예비역 육군 중장이었다. 이런 말을 자주했다. “나는 먼지와 가래침을 싫어한다. 공산당은 더 싫다.” 내놓고 말만 안 했을 뿐,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의 사상도 의심한 적이 있었다. 대만에 있는 국민당 원로 구정강(谷正綱·곡정강)이 회장인 국제반공연맹 부회장직을 자청할 정도였다.

쉬자툰이 홍콩에 부임했을 때 위자오치는 83세의 노인이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신임 신화통신 분사 사장을 만나자고 했다. 거절당할 리가 없었다. 쉬자툰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노인을 찾아갔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대형 초상화와 청천백일기가 걸려있는 방에서 쉬자툰을 만난 노인은 연하의 공산당원을 감상하는 눈치였다.

“대륙의 정책을 눈여겨보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옛날보다 많이 변했다. 공산당도 변했다. 좋은 쪽으로 변해서 다행이다. 공산주의 포기했으면 당 명칭도 바꿔야 한다. 민주, 두 자가 들어간 당명이 적합하다. 그럴 용의가 있는지 궁금해서 보자고 했다. 그렇게만 되면 대륙에 투자하고 싶다. 나는 수십 년간 공산당과 싸웠다. 대륙에서 철수할 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공산당은 홍콩에서도 폭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문혁 시절 홍콩 좌파들의 극성은 꼴불견이었다. 대륙보다 더 심했다. 아름다운 위안랑(元朗)을 흉하게 만들어 버렸다. 복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친구 샤오이푸(邵逸夫·소일부)의 생각도 나와 별 차이 없다. 한번 만나봐라.”

쉬자툰은 노인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국·공 양당의 모순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우리는 같은 민족입니다. 과거는 더 이상 회상하지 마십시오. 현재가 중요합니다. 번영과 통일을 위해 다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대륙은 개혁과 개방이 진행 중입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생각은 존중합니다만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자오치는 대인이었다. 쉬자툰을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해마다 명절이 되면 편지와 선물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1967년 까오룽(九龍)폭동의 발원지 위안랑. [사진 김명호]

1967년 까오룽(九龍)폭동의 발원지 위안랑. [사진 김명호]

중공 통전의 기본방침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제시한 구대동, 존소이(求大同, 存小異), ‘함께 어울리기를 추구하려면, 작은 이견은 어쩔 수 없다’ 였다. 위자오치를 만난 쉬자툰은 그간 홍콩분사가 취해오던 대대만(對臺灣) 통전 방침에 회의를 느꼈다. 홍콩의 친대만 인사는 빈부를 막론하고 ‘반공’ 두 글자가 머리에 박혀있었다. 공산당을 두려워하고, 공산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싫어했다. 1984년 중추절 연회 자리에서 구대동, 존대이(求大同, 存大異)를 선언해버렸다. 친 대만계 인사들은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신화통신 홍콩분사는 친대만계 인사 중 통전 대상을 물색했다. 첫 번째 대상으로 위자오치가 말한 샤오이푸를 선정했다. 샤오이푸는 홍콩TV와 영화사 쇼브라더스를 소유한 방송과 영화계의 거목이었다. 접촉을 위해 온갖 지혜를 짜냈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홍콩TV 부총경리가 홍콩분사 선전부장 앞으로 사장의 참관을 간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참관 당일 쉬자툰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문 앞에서 홍콩의 남녀 연예인 두 명과 기다리던 샤오이푸가 쉬자툰 일행을 끝까지 수행했다. 쉬자툰은 감격했다. 기록을 남겼다. “샤오이푸는 그간 중공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공공장소에서 신화분사 사람들과 대면은 처음이었다. 풍성한 오찬과 환대가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정식으로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 초청했다. 10월 10일 대만의 쌍십절 기념행사 준비위원이라며 잠시 머뭇거렸다. 상관없다고 하자 함박웃음 지으며 싱글벙글했다.”

장쩌민, 쉬자툰이 시키는 대로 해

샤오이푸의 중년 시절 모습. 10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하루에 40분 정도 고개 들고 태양 응시한 것 외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었다. [사진 김명호]

샤오이푸의 중년 시절 모습. 10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하루에 40분 정도 고개 들고 태양 응시한 것 외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었다. [사진 김명호]

샤오이푸는 쉬자툰의 만찬 초대도 순순히 응했다. 샤오의 고향은 저장(浙江)성 닝포(寧波)였다. 쉬자툰이 제의한 고향 방문에 즐거워했지만 확답은 주지 않았다. 시기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답을 주기까지 1년이 걸렸다. “상하이와 저장성 일대를 가보고 싶다.” 쉬자툰은 즉석에서 환영을 표했다. “쑤저우(蘇州)도 참관해라. 내가 직접 안내하겠다.” 샤오이푸는 우리의 판소리 비슷한 쑤저우핑탄(評彈)의 애호가였다.

쉬자툰은 저장성과 상하이 시 정부에 서신을 보냈다. “샤오이푸 일행을 열렬히 환영해라. 성장과 시장이 직접 공항에 나가라.” 상하이 공항에 내린 샤오이푸는 통전부 처장의 마중을 받고 입맛이 씁쓸했다. 쑤저우에 와있던 쉬자툰은 소식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부시장을 상하이로 보냈다. “샤오이푸 일행을 모시고 와라. 나는 호텔 문전에서 기다리겠다.”

쉬자툰과 샤오이푸는 쑤저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핑탄과 희극 감상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기 전날 쉬자툰은 상하이 시장 장쩌민(江澤民·강택민)에게 전화를 했다. “공항에서 결례를 만회해라.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쉬자툰의 후임을 희망하던 장쩌민은 시키는 대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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