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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중 1.2m 눈에 빠져 허우적… 한라산에서 '방전'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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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호 25면

“아니, 대체 뭐하시는 분입니까?” “영화배우 아니십니까?”
배우 곽도원(46)과의 짧은 대화는 이렇게 동문서답으로 시작했다. 지난 13일 오후 한라산 해발 1300m 지점에서였다.

성예진, 김선경(앞부터)씨 등 대한산악구조협회 대원들이 지난 2월14일 한라산 장구목 하단에서 설상등반 훈련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성예진, 김선경(앞부터)씨 등 대한산악구조협회 대원들이 지난 2월14일 한라산 장구목 하단에서 설상등반 훈련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한라산 서북쪽에서 바라본 백록담 멀리 전망 데크가 보인다. 오성찬 작가의 소설 『한라산』에서는 주인공 센오서방이 서북벽을 넘은 뒤 백록담에서 방목 중인 소떼를 살펴보는 장면이 나온다. [중앙포토]

한라산 서북쪽에서 바라본 백록담 멀리 전망 데크가 보인다. 오성찬 작가의 소설 『한라산』에서는 주인공 센오서방이 서북벽을 넘은 뒤 백록담에서 방목 중인 소떼를 살펴보는 장면이 나온다. [중앙포토]

최근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역으로 나온 곽 배우는 35㎏짜리 배낭을 메고 올라가는 기자를 보고 궁금해했다. 제주에 살며 제주 홍보대사를 지냈던 그는 하산 중 45㎏짜리를 짊어진 양재원(30·서울)씨도 만났을 것이다. 체중의 3분의 1 이하로 배낭을 메는 게 정석. 하지만 몸무게 2분의 1, 3분의 2를 짊어지고 한반도 남쪽 최고봉인 한라산(1947m)을 오르는 이유는 뭘까.

■ 대한산악구조협회 동계훈련 따라가 보니

한국전쟁 직후의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오성찬(1940~2012)의 소설『한라산』은 잃어버린 태상박이(이마에 흰 점이 있는 소)를 찾아 헤매는 테우리(목동) 센오서방을 그린다. 이 소설에서 소는 사람과 동격이다. 가족이다. 동네 어른인 황 장의는 센오서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겨울을 넘기게 하려니까 … 추위에 견디는 법도 가르쳐야 헤여 … 2월쯤 아직 한라산에 눈이 쌓인 때 밖으로 내몰아 버리는 거여.”

대한산악구조협회(회장 노익상) 산하 서울 산악구조대와 제주 산악안전대 22명은 지난 13~15일 한라산 동계훈련에 들어갔다. 추위를 견디고 눈에서 버티는 법을 길들이는 것이다. 관음사 코스와 겹치는 용진각 대피소 터~장구목 오름~용진각 터가 루트다. 장구목 구간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한라산 국립공원공단은 적설기·구조 훈련을 조건으로 허가를 내준다. 적설량은 최소 20cm가 돼야 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부재윤(48) 한라산 국립공원 팀장은 “20cm가 넘더라도 눈이 순차적으로 내려 밑바닥이 다져져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발길에 ‘길’이 생기는 훼손의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오순희(50) 제주 산악안전대장은 “조릿대가 보이지 않는 정도의 눈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국립공원에서는 눈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훈련 허용 여부를 결정한다.

지난 16~17일 예기치 않은 눈이 한바탕 내렸지만 이전까지 눈다운 눈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한라산에서도 1500m 고지대에서야 눈이 보였다. 하지만 겨우내 눈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북쪽 탐라계곡은 1.5m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 눈 여러 번, 20cm 이상 내려야 훈련
『한라산』속 테우리들은 산에서 폭우를 만나고 간담이 써늘해졌다. “거 한 시간만 비를 맞았으면 아주 골로 가겄네….” “그러길래 산엘 올 때는 만반 준비를 해야 하는 건디….”

지난 2월 13일 오후 한라산 1300m 지점에서 만난 배우 곽도원(오른쪽). 그는 35kg에 달하는 배낭을 멘 기자를 보고 "뭐하는 분이세요"라고 물어봤다. 김홍준 기자

지난 2월 13일 오후 한라산 1300m 지점에서 만난 배우 곽도원(오른쪽). 그는 35kg에 달하는 배낭을 멘 기자를 보고 "뭐하는 분이세요"라고 물어봤다. 김홍준 기자

단단히, 넉넉히 챙긴 산악구조협회 훈련대의 배낭 무게는 평균 37㎏. 휘청거리며 삼각봉 대피소에 들어서자 해가 졌다. 3시간이면 올 거리를, 5시간이나 들였다. 야영지 구축도 훈련의 하나다. 박기성(53·서울)·심창국(47·서울)씨의 화려한 손놀림 속에 텐트들이 들어섰다.

14일 새벽, 구은수(50·서울) 등반기술 이사는 본격 훈련에 들어가는 대원들에게 “잠도 중요하지만, 배변도 중요하다”며 “절대 참지 마라, 손가락으로 파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적나라하지만, 원초적 생리현상이 고산에서는 목숨과 직결된다는 뜻이었다.

오묘한 날이었다. 기온은 봄·가을이었고 볕은 여름이었으며 발밑은 겨울이었다. 장구목 하단, 무릎까지 차는 눈은 위태로웠다. 반쯤 먹은 빙수처럼 소멸의 길로 가고 있었다. 43일간 백두대간 일시종주를 한 성예진(24·서울)씨는 오르막에서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반까지 눈에 잠겼다. “제가 단신이라, 러셀(눈을 파헤치며 길을 만드는 방법) 한 지점에 다리를 못 뻗겠네요, 하하.”

러셀을 한 김형수(49) 서울 산악구조대장의 뒤를 따라갔다. 김 대장이 오른발로 디딘 곳을 기자가 왼발로 디뎠다. 요행은 없었다. 그대로 곤두박질. 러셀을 번갈아 한 강장훈(51·제주)씨는 “발을 바꾸면 몸의 중심축도 바뀌기 때문”이라고 알려줬다. 짧은 순간에 얻은 깊은 교훈에도 1시간 동안 헛발질은 20여 차례. 날카로운 크램폰(아이젠)은 반대편 다리를 여러 번 찍었다. 피 번짐이 느껴졌다. 뜸을 들였더니 소설 속 테우리들이 채근했다. “잔말 말고 따라붙어! 떨어졌다가는 길을 잃고 죽는 판이여!”

지난 2월 13일 한라산 장구목 아래 용진각 대피소 터에 자리잡은 대한산악구조협회 동계훈련 야영지. 1974년 세워진 용진각 대피소는 2007년 태풍 나리에 무너졌다. 김홍준 기자

지난 2월 13일 한라산 장구목 아래 용진각 대피소 터에 자리잡은 대한산악구조협회 동계훈련 야영지. 1974년 세워진 용진각 대피소는 2007년 태풍 나리에 무너졌다. 김홍준 기자

서울 산악구조대의 김기호씨가 지난 2월 13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 한라산 관음사 코스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그의 배낭은 40kg을 웃돌았다. 김홍준 기자

서울 산악구조대의 김기호씨가 지난 2월 13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 한라산 관음사 코스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그의 배낭은 40kg을 웃돌았다. 김홍준 기자

# 외마디 지르며 가파른 사면에서 추락

절벽을 휘감고 오르자 장구목 능선이 드러났다. 축구장 5개를 잇댈 수 있을 정도로 너른 평지다. 고상돈(1948~1979)을 기리는 케언(cairn·돌무더기)이 중간에 있다. 고상돈은 1977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른 제주의 아들이다.

제주 산악안전대 김우섭(56)씨는 “한라산은 설상 등반의 메카”라며 “고상돈 선배도 한라산 눈 속에서 에베레스트에 오를 꿈과 힘을 키운 것”이라고 말했다.

장구목은 오름 중 가장 높은 곳(1813m)에 자리 잡고 있다. 장구 모양새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 비탈을 스위치 백으로 오르는 협궤열차처럼 일행은 숨을 골라야 했다.

이제부터는 기술 등반이 더 요구된다. 가파른 사면을 횡단(트래버스)해야 한다. 크램폰을 강하게 찍었는데 발밑이 허전했다. “으악!” 외마디를 지르며 추락했다. 안전벨트와 연결된 고리(카라비너)가 고정된 로프를 힘껏 잡아끌었다. 다행히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 박재승(43·제주)씨가 끌고 밀며 사면에서 탈출시켜 줬다.

제주 산악안전대 대원들이 지난 2월 14일 한라산 장구목 오름 횡단(트래버스) 구간에서 신중하게 등반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 산악안전대 대원들이 지난 2월 14일 한라산 장구목 오름 횡단(트래버스) 구간에서 신중하게 등반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2월 14일 한라산 장구목 오름을 지난 뒤 만난 백록담 서북벽. 서북벽 구간은 안전상의 문제로 1986년 폐쇄됐다. 김홍준 기자

지난 2월 14일 한라산 장구목 오름을 지난 뒤 만난 백록담 서북벽. 서북벽 구간은 안전상의 문제로 1986년 폐쇄됐다. 김홍준 기자

서쪽에 소설 속 센오서방이 태상박이를 찾아 헤맨 방아오름이 보였다. 앞에는 백록담 서북벽이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었다. 센오서방은 장구목 능선의 어느 구상나무 밑에서 한뎃잠을 청한 뒤 이곳을 넘어 백록담에 올랐다. 오성찬 작가의 묘사로 대신한다. ‘벼랑이 뚝 잘려나간 데가 앞을 막아섰다…비바람에 무너진 것인 듯했다 … 떨어져 내린 돌 부스러기들이 더럭 그의 마음에 공포감을 안겼다.’ 그래서였다. 이 소설이 나온 지 8년 만인 1986년에 서북벽 구간은 폐쇄됐다. 센우서방은 ‘길마턱’에 올라 백록담에 든 뒤 등터진궤·작은속밭·큰속밭·사라오름 등을 누볐지만 우리는 여기까지. 하산에 들어갔다.

북쪽 계곡은 유난히 시리다. 구르듯 내려섰다. 어서 텐트에 가서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러셀을 10분 넘게 했다. 오를 때보다 더 깊은 눈이었다. 1.2m, 배까지 푹푹 빠졌다. 미얀마에서 와 구조 활동을 하는 나잉우(45·서울)씨는 발을 빼지 못해 피켈로 눈을 파내야 했다. 눈에 빠진 정강이와 허벅지의 위치가 엇갈리면서 무릎 관절이 여러 차례 돌아갈 뻔했다. 체력은 곤두박질쳤다.

대한산악구조협회 산하 서울 산악구조대 정호선씨가 한라산 장구목 오름에서 내려오다 눈에 빠지고 있다. 지난달 15일까지 눈다운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백록담 북쪽에서 뻗어내린 탐라계곡에는 1.5m의 눈이 쌓여 있었다. 김홍준 기자

대한산악구조협회 산하 서울 산악구조대 정호선씨가 한라산 장구목 오름에서 내려오다 눈에 빠지고 있다. 지난달 15일까지 눈다운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백록담 북쪽에서 뻗어내린 탐라계곡에는 1.5m의 눈이 쌓여 있었다. 김홍준 기자

김기호(53·서울)씨는 “러셀 땐 힘이 5배 더 들고 부상이 잦다”고 말했다. 야영지는 보이는데, 5분의 1배속 동영상처럼 진행이 더뎠다. 50m, 30m, 10m … . 텐트에 돌아왔다. 쓰러졌다. ‘이런 훈련을 이겨내니 구조대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암전.

『한라산』의 태상박이는 송아지와 함께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상산(上山)에서 낳은 새끼 한 마리 더 데리고. 4개월간 산을 헤맨 센오서방은 아내 예촌방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춘다. 잠자던 아이들이 일어났다. “무슨 일로 야단임꽈?”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한라산=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지난 2월 15일 한라산 용진각 대피소 터에서 하산하기 직전의 대한산악구조협회 동계훈련 대원들. 김홍준 기자

지난 2월 15일 한라산 용진각 대피소 터에서 하산하기 직전의 대한산악구조협회 동계훈련 대원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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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발열 증세, 인후통이 있다면 야외 활동은 금물. 기자는 제주 공항에서 발열감시카메라에 적발됐지만 세부 측정 시 옷을 두껍게 입어 일시적으로 몸에서 열이 난 것으로 판명됐다. 체온은 정상이었다.

지난 2월 19일 한라산 등산로 모습. 이틀 전에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렸다. 사진=오순희

지난 2월 19일 한라산 등산로 모습. 이틀 전에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렸다. 사진=오순희

* 지난 2월 1일부터 실시된 한라산 탐방예약제 시범운영은 2월 13일부터 전면 유보됐다. 이전처럼 인원 제한 없이 탐방 가능하다는 얘기다. 한라산 국립공원 관계자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시각에 따른 구간별 출입 통제는 여전하다. 백록담까지 갈 수 있는 두 개 코스인 성판악·관음사 탐방로는 오전 12시 이후(11월~2월 기준) 들어갈 수 없다.

* 지난 2월 16~17일에 걸쳐 내린 많은 눈으로 한라산은 지금 눈꽃 산행이 절정이다. 한라산 하단의 기온이 예년보다 높다보니 아예 두터운 의류를 벗어던지고 산행한 뒤 하산 때 챙겨가는 등산객들도 있다. 산행 중에는 얇은 옷을 여러겹 덧대 입는 '레이어링 시스템'을 활용하는 게 좋다. 움직일 땐 한겹 벗고, 쉴 때는 덧입어야 체온 손실을 막을 수 있다.

* 한라산에는 현무암이 코스 상에 깔려 있다. 올라갈 땐 괜찮지만, 내려갈 땐 발바닥 고문이 될 수 있다. 등산화, 그것도 바닥 탄탄하고 접지력 좋은 것을 신는 게 좋다. 아이젠도 필수다. 스틱을 활용하면 보다 부드럽게 산행할 수 있다.

한라산은 지금 눈 천국이다. 등산화와 아이젠은 필수다. [중앙포토]

한라산은 지금 눈 천국이다. 등산화와 아이젠은 필수다. [중앙포토]

* 한라산 동계훈련은 대한산악연맹 산하 기관과 연맹 가입 산악회, 구조 활동을 하는 군경·구조대 등이 시도연맹의 추천을 받아 신청 가능하다. 기자는 대한산악연맹 산하 서울시 산악연맹 소속이다.

* 기사 안의 소설 『한라산』 인용 부분은 맞춤법과 관계없이 1979년 정우사에서 초판 발행된 책 본문을 그대로 따왔다.

* 오성찬 작가가 1970년 5월 9일 제주신문에 쓴 글에 의하면, 한라산에서의 방목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 충렬왕 때부터 본격화됐다. 한라산 방목은 1988년 전면 금지됐다. 조릿대가 번성하자 2016년부터 만세동산에서 말 방목을 실험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 기사 안의 한라산 높이 1947m는 국토지리정보원이 2005년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측량으로 산출한 1947.26m를 기준으로 했다. 이전까지 국토지리정보원은 1966년 평균 해수면을 기준으로 삼각 측량한 1950.11m를 공식 고도로 사용해 왔다. 이후 2016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항공기에서 레이저를 쏘는 라이다(LiDAR) 촬영 방식을 통해 한라산의 최고 표고점(최고 높이)은 1947.06m(표준오차 ±3.8㎝)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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