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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연상 아내 떠나고…개성 더 짙어져 돌아온 피아니스트

중앙일보

입력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15년 만의 내한 독주를 한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빈체로]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15년 만의 내한 독주를 한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빈체로]

이상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는 연주였다.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62) 독주회. 옛 유고슬라비아 태생으로 1980년대와 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는 이날 바흐ㆍ베토벤ㆍ쇼팽ㆍ라벨을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내한공연 리뷰

포고렐리치는 모든 곡의 악보를 피아노 위에 놓고 보면서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악보대로 친 부분은 거의 없었다. 특히 베토벤에서는 악보에 표시가 없는데도 느려지거나 빨라졌다. 어떤 음표들은 원래보다 미세하게 짧거나 길었는데 같은 부분이 나올 때마다 그렇게 했다.

2부에선 더했다. 쇼팽의 뱃노래는 첫 리듬부터 독특했다. 왼손으로 8분음표 12개를 연주하는 도입부에서 3,6,9번째 음표마다 길게 늘이면서 리듬이 더욱 출렁거리도록 했다. 또 원래는 잘 안 들리게 연주되는 음들이 주요 멜로디를 뚫고 울려퍼지게 했다. 악보에 없는 액센트가 들어간 음들은 기이한 소리로 강조됐다. 쇼팽의 전주곡 작품번호 45에서는 는 일부러 음악적 부분을 조각 나도록 만든 후 이어붙이지 않았다.

압권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였다. 젊은 시절 이미 포고렐리치의 장기인 곡으로 세계에 알렸던 작품이다. 어렵기로 유명한 이 곡에서 포고렐리치의 기술은 아직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같은 음을 빠르게 여러번  치는 것, 왼손과 오른손을 엇갈리는 것, 약한 손가락으로 내는 강한 음 같은 기술은 여전했다. 그는 음악적 시간을 자신만의 틀 안에서 다시 조직했다. 박자와 리듬을 규칙적으로 세면서 들으면 계속해서 어긋나게 되는 연주였다. 엉뚱한 곳에서 멈춰서고 갑작스러운 소리를 강조했다.

과거의 포고렐리치.

과거의 포고렐리치.

과거의 포고렐리치.

과거의 포고렐리치.

포고렐리치는 원래 독특한 연주로 유명했다. 1980년 쇼팽 콩쿠르에 나갔을 때는 쇼팽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연주를 하고 탈락했다. 하지만 독특한 세계를 알아본 거장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그의 탈락과 함께 심사위원직을 사퇴하면서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내는 음반마다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내놨다.

하지만 이번 내한 연주에서의 독특함은 예전의 개성과도 달랐다. 젊은 시절의 그가 날렵하면서 재치있는 정도의 세계를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기존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는 수준이었다. 듣는 사람들이 느낄 생경함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곡을 악보를 보며 연주한 포고렐리치. [사진 빈체로]

모든 곡을 악보를 보며 연주한 포고렐리치. [사진 빈체로]

포고렐리치의 오랜 공백을 알고 나면 더욱 단단해진 독특함을 이해하는 단서를 얻게 된다. 그는 1996년 이후 몇 년 동안 아예 바깥출입을 삼갔다. 아내인 피아니스트 알리자 케제라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케제라체는 포고렐리치가 17세일 때부터 스승이었고 21년 연상이었다. 아내가 간암으로 숨진 후 포고렐리치는 한동안 무대에 나타나지도, 음반을 녹음하지도 않았다.

2006년 독일 디 벨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피아노를 건드릴 때마다 추억이 폭포처럼 넘쳐서 만질 수도 없었다. 다시 뭔가 할 수 있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심지어 걸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또 음악적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완성한 스승으로서의 모습도 기억했다.

이보 포고렐리치의 최근 사진. [사진 빈체로]

이보 포고렐리치의 최근 사진. [사진 빈체로]

그가 재기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지만 예전처럼 활발하진 않았다. 특히 음반은 1998년 마지막으로 낸 후 21년을 건너뛰고, 지난해에야 다시 발매했다. 한국 독주회 또한 15년 만이었다. 워낙에 독창적이었던 문제적 청년 피아니스트의 세계는 고통을 겪은 후 더 내면으로 파고 들어간 듯했다. 호평과 혹평은 40년 전보다 더욱 강하게 엇갈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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