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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문자 쓰는 직장 선배의 대나무 복조리에 담긴 뜻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54)

회사의 대선배이자 직속상사인 노 모씨. 그는 평소 괄괄한 목소리로 육두문자 쓰기를 즐겨 젊은 사원들 사이에서 ‘갱스터’라고 불린다. 한데 그는 인기가 좋은 갱스터다. 사실은 정이 많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두 알고 있다.

얼마 전 노 씨의 차를 빌려 타고 외근을 갈 일이 있었다. 차에 타보니 그는 역시나 단순하고 명쾌한 사람이었다. 대나무 방석이라든지, 십자가라든지, 영수증이나 동전, 콧털가위나 벗어 둔 재킷, 휴지나 물티슈 등 으레 운전석에서 보이는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차에 놓은 물건은 딱 하나, 재떨이였다. 참 일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차를 몰았다.

그런데 회사로 돌아와 차에서 내리면서 보니 뒷자리에 묘한 게 놓여 있었다.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이질감을 가진 묘하고 작은 물건. 그것은 대나무로 짜인 복조리였다. 그가 복조리 같은 물건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지만, 더욱 의외인 건 복조리의 상태였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그 만듦새를 보면서, 나는 필시 무슨 사연이 담겨 있으리라는 확신을 했다.

노는 복조리를 파는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본 것일까. 자신의 젊은 시절일까. 혹시 그것은, 무언가를 막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응원, 혹은 어떤 경의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중앙포토]

노는 복조리를 파는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본 것일까. 자신의 젊은 시절일까. 혹시 그것은, 무언가를 막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응원, 혹은 어떤 경의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중앙포토]

외근 결과 보고가 끝나고, 대화가 거의 농담으로 이루어진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은근슬쩍 물었다. “차 뒷자리에 복조리가 있던데요.” 그러자 “아, 어느 날인가 술 처먹고 앉아 있는데 대학생들이 들어와서 팔길래 하나 샀어. 옛날 생각이 나서”라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옛날 생각이요?” 나는 되물었다.

듣자 하니 선배는 대학시절에 찹쌀떡을 팔았다고 한다. 방학 때 고향에 가야 하는데 차비는 없고, 그래서 떡을 떼다가 발품 팔아 팔고, 며칠 그렇게 돈을 모아서 친구들하고 진하게 술 한 잔 푸고, 그리고 차표를 사서 집에 내려갔다고 한다. 30년 전의 일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복조리를 파는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본 것일까. 자신의 젊은 시절일까. 혹시 그것은, 무언가를 막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응원, 혹은 어떤 경의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 복잡하고, 여리고,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나의 시가 떠올랐다.

새봄에 돋아나는 새순보다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이련다
-이승원, 「사람의 마음이련다」 부분. 시집 『숨 고르기(퍼플, 2020)』에 수록

외국 영화 ‘인턴’ 은 은퇴하고 집에서 놀던 노인 벤(로버트 드 니로)이 새로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다. 은은한 울림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 영화, 관객들이 입을 모아 꼽는 명장면이 하나 있으니 바로 ‘출근 전날 장면’이다. 알람을 맞추고 침대에 누운 벤은 잠시 후 시계를 하나 더 꺼낸다. 알람을 두 개나 켜 두고 자는 그의 기분을 관객들은 모두 안다. 첫 출근 전날 밤의 긴장과 설렘, 잘하고 싶다는 의지, 늦잠 자지 않겠다는 다짐, 그런 것들이 70세의 인턴에게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했던 모양이다.

 이승원 캘리그라피 시집『숨고르기』.

이승원 캘리그라피 시집『숨고르기』.

위에 인용한 이승원의 시는 이 감격을 포착해낸다. 그는 ‘가슴 설레는 것은’이라고 쓰지 않고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은’이라고 썼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의 설렘이 아니라, 그 설렘을 지켜보는 사람의 감격에 대해 그는 쓰고 있다. 그는 참 잘 짚었다. ‘인턴’을 보면서 느끼는 감흥, 복조리 파는 대학생을 보며 느끼는 감흥, 남의 일이지만 그런 감흥에 젖고 마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고. 그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듯 이야기한다.

이승원은 1981년에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나 2015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시를 주로 쓰는 그는 유아교육을 전공한 유아교사이기도 하다. 유아가 늘 뭔가를 시작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매일 보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지나, 찹쌀떡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던 가난한 청년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요새 아침마다 손주와 영상통화를 한다. 아이를 보며 껄껄 웃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다. 업무가 시작되면 언제나 갱스터로 돌아오고 말지만, 그는 내가 좋아하는 갱스터다. 그가 다른 사람의 설렘에 반응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말이다.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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