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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느긋해진 트럼프에 속타는 김정은…“도발 쉽지 않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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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코로나 창궐 사태 속 김정은의 생존전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0월 김여정(왼쪽)·조용원(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 등 주요 간부들과 함께 백마(白馬)를 타고 백두산을 등정했다. 북한이 ‘혁명의 성지’라 주장하는 백두산에 ‘백두혈통’으로 선전하는 김씨 일가 세습통치의 상징인 백마 타고 오르는 모습을 통해 김 위원장 위상이 굳건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조선중앙TV 캡처=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0월 김여정(왼쪽)·조용원(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 등 주요 간부들과 함께 백마(白馬)를 타고 백두산을 등정했다. 북한이 ‘혁명의 성지’라 주장하는 백두산에 ‘백두혈통’으로 선전하는 김씨 일가 세습통치의 상징인 백마 타고 오르는 모습을 통해 김 위원장 위상이 굳건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조선중앙TV 캡처=연합뉴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중국발 코로나19 유탄에 휘청이고 있다. “단 한 명의 감염자도 없다”(2월 19일 자 노동신문)는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발병설이 퍼져 흉흉한 데다, 체제 전반에 속속 충격파를 미치고 있다. 지난 8일 창군절 기념 군사 퍼레이드가 취소된 데 이어 16일에는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 78회 생일 기념 보고대회도 열지 못했다.

‘정면돌파전’ 선언 후 잇단 악재 #태영호 출마 선언에 침묵하면서 #문재인 정부엔 “정신 덜 차렸다” #“미 재선 때엔 북 도발 없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선 아버지의 생일상을 차리지 못한 셈이다. 지난해 12월 말 노동당 전원회의를 열어 미국의 대북제재 장기화에 대응한 ‘정면돌파전’을 선언했지만 코로나19 비상방역체계 가동에 금세 추동력을 잃어버렸다. 김정은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흥미를 잃었다는 워싱턴발 보도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후견인 역할을 해온 시진핑 체제의 중국은 경황이 없다. 김정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제 아침 통일부 공보실의 대북·통일 관련 기사 스크랩엔 달랑 하나의 기사만 실렸다. 중국 어선이 북한 수역에 들어가 조업하는 바람에 우리 어민들의 오징어 어획량이 5년 새 20% 수준으로 급감했다는 내용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참가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 때 A4 용지 100쪽이 넘는 분량의 기사가 빽빽하게 실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오징어가 스크랩 체면을 살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대북 이슈와 남북 관계 공백에다 코로나19 창궐이 가져온 북한 뉴스의 완전 실종사태가 현실화한 것이다.

코로나 의식해 간부들과 거리두기

이런 상황은 김정은에겐 존재감 상실과 마찬가지다. 한때 서울의 신문·방송뿐 아니라 유력 외신의 톱기사를 장식하던 그가 세인들의 뇌리 속에서 잊히고 있는 것이다. 2020년 신년사를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 보고문으로 대체한 김정은 위원장은 북·미 대화에 대한 기대를 접을 것임을 시사하며 정면돌파전을 선언했다. 직접 경제 현장을 챙길 기세였지만, 코로나 감염병이 발목을 잡았다.

김정은을 이른바 ‘최고 존엄’으로 내세우며 절대시하는 북한 체제에선 만에 하나라도 방역망이 뚫리면 큰일 난다는 위기의식이 공유된다. 김정일 생일을 맞아 그의 시신이 보관된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은 김정은이 예전과 달리 핵심 당 간부들과 뚝 떨어져 참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월 25일 설 명절 축하공연 관람 이후 22일 만에 공석에 모습을 보인 김정은은 다시 은둔에 들어갔다. 사실상 자가격리에 접어든 형국이다. 공장·기업소 등 경제현장 방문은 김재룡 총리가 대신하고 있다는 게 노동신문의 보도다.

코로나19 때문에 북한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북한 관영 매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례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코로나 발생 국가의 확진자·사망자 숫자를 거의 실시간으로 알리고, 하루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중앙TV와 제3 방송(내부용 유선방송) 등을 통해 캠페인 보도를 내보낸다. 한국의 발병 상황을 팩트 위주로 소상하게 전하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과거엔 대남 비난의 소재로 쓰는 데 급급했지만 이번엔 주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 장마당의 물가와 환율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과 함께 북·중 접경 지역의 밀무역 루트를 통한 감염 전파와 북한 당국의 단속 강화 뉴스도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정은의 속을 타게 하는 건 트럼프 미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관측일 수 있다. 미 CNN 방송이 지난 10일 보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 전에 김정은 위원장과 3차 정상회담을 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전했을 때만 해도 사실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보좌관이 이틀 뒤 “또 다른 (미국과 북한 간의) 정상회담이 적절한지는 지켜봐야 한다”며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오브라이언이 지난 6일 “미·북 비핵화 협상이 대선 등 미국의 국내 정치 일정에 전혀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고 한 발언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아니냐는 측면에서다.

문재인 정부에 대립각을 세워온 김정은으로서는 ‘개별관광’ 제안도 마뜩잖은 듯하다. 유엔과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의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밀어붙이는 금강산 관광 재개나 개성공단 재가동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북한 대남파트에선 내렸을 공산이 크다. 북한 입장에선 문재인 정부가 제재를 뛰어넘어 남북관계를 추진할 의지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북한 매체는 19일 문 대통령을 ‘남조선 집권자’로 폄훼하며 “사대와 외세 굴종의 냄새가 푹푹 풍긴다” 거나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라는 비방을 펼쳤다.

김정은의 심기를 한층 불편하게 만든 최악의 뉴스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국회의원 출마가 아닐까 싶다. 2016년 탈북 망명한 태 전 공사는 지난 11일 4·15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의 지역구 출마 첫 일성은 한국 정착 후 얻은 이름 ‘구민(救民)’에 따라 북한 민중을 김정은 독재에서 구출해내겠다는 것이었다. 태 전 공사는 유창한 영어를 무기로 외신회견을 통해 김정은 비판 메시지를 잇달아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섣부르게 대응했다간 북한이 낭패를 볼 수 있고, 공개 유세 등에 나선 그에게 위해를 가했다가는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처가 쉽지 않다. 태 전 공사에게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을 퍼붓던 북한이 아직 아무런 반응을 내지 못하고 함구하는 것도 이런 고민 때문으로 보인다.

올 가을 후계자 등장 10년 맞아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김정은으로선 그야말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판이다. 오는 9월은 그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란 직함과 북한군 대장 칭호를 받으며 공개석상에 처음 등장한 지 꼭 10년이 되는 시점이다. 후계자 추대 이후 10년간의 리더십을 평가받는 자리일 수 있다. 10월엔 노동당 창건 75주년이 잡혀있다. 2016년 5월 열린 7차 노동당 대회에서 야심 차게 발표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마무리해야 하는 해이기도 하다.

적지 않은 전문기관과 학자·연구자 그룹에서 이런 압박감에 시달리는 상황이 이어질 경우 김정은이 도발국면으로 전환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관측에도 힘이 실린다. 지난해 말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던 김정은이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서 기가 꺾였고, 수세적 내부 관리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이란 최고 실세인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지난달 폭살시키는 등 김정은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냈다. E-8C 조인트 스타즈(J-STARS) 지상 감시용 정찰기를 18일 한반도에 전개하는 등 대북압박을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미국 재선이 있던 2004년과 2012년 북한의 도발이 없었고, 지난달 8일 김정은 생일에 시진핑이 보낸 축하 서한에도 도발 자제 메시지가 실려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코로나 사태로 리더십에 위기를 겪고 있는 시진핑, 재선 가도를 달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 트럼프의 인내심을 시험할 도발을 감행하는 건 김정은에게 나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백두산 등정 때 후계자로 여동생 김여정 지명"

안찬일 박사가 19일 유튜브 에서 김정은이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을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주장했다. [유튜브 캡처]

안찬일 박사가 19일 유튜브 에서 김정은이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을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주장했다. [유튜브 캡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의 후계자로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지명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탈북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은 20일 자신의 유튜브인 ‘안찬일TV’를 통해 “지난해 10월 김정은이 백두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수행한 간부들에게 ‘이제 나의 후계자는 김여정 동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안 이사장은 "김정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 1월 프랑스 의료진이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을 치료했다”면서 "젊은 나이(36)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이 후계 지명을 서두른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에 적대적인 인사들을 잇달아 제거하고 있는 점도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5일 설 명절 축하공연에 김정은이 고모 김경희 노동당 전 부장을 6년 만에 등장시켰고, 그 옆자리에 김여정이 앉도록 한 것도 이른바 ‘백두혈통’으로 불리는 ‘김씨 일가’를 부각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안 이사장의 분석이다. 김정은은 부인 이설주와 사이에 세 자녀를 뒀지만, 모두 10살 이하의 어린 나이로 파악되고 있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후계자를 공개하면 권력 누수가 있을 것이란 점에서 김정은이 조기 지명을 했을 것인지는 다소 의문”이라며 "추가 정보 확인이 필요하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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