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교 자주’ 꿈꾼 고종의 국새, 알파벳 새겨진 채 고국 품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새 대군주보(왼쪽)가 특별 공개되고 있다. 대군주보는 외교관련 업무를 위해 고종의 명에 따라 1882년에 제작된 것으로 문화재청은 지난 해 12월 재미교포 이대수(84세) 씨로부터 '효종어보'(오른쪽)과 함께 기증 받았다. [뉴스1]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새 대군주보(왼쪽)가 특별 공개되고 있다. 대군주보는 외교관련 업무를 위해 고종의 명에 따라 1882년에 제작된 것으로 문화재청은 지난 해 12월 재미교포 이대수(84세) 씨로부터 '효종어보'(오른쪽)과 함께 기증 받았다. [뉴스1]

어른 주먹보다 더 큰 거북이 몸체가 각각 은색과 금색으로 빛났다. 누군지 모를 손에 들려 미국 땅으로 건너갔다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온 조선 왕의 국새‧어보다. 이 중 은색 거북이의 몸체 바닥엔 정사각형 테두리 안에 ‘대군주보(大君主寶)’라고 새겨져 있다. 구한말 ‘외교 자주’를 꿈꾸며 스스로 대군주(大君主)를 자처하고 ‘천자’를 뜻하는 보(寶)를 국새에 처음 넣기 시작한 고종(재위 1863∼1907)의 자취다.

1882년 제작됐던 구한말 국새 '대군주보' #재미교포가 '효종어보'와 함께 국가 기증 #거북 손잡이 아래 외국인 이름 각인 뚜렷 #문화재청 "더 많은 환수 길 터주길 기대"

고종은 1882년(고종 19년) 외교문서 날인 등 용도로 대군주보 등 국새 3종을 동시 제작했다. 이들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광무개혁) 때까지 외국과 각종 통상 조약 체결에 쓰였지만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한 경매사이트에 나온 대군주보를 재미교포 사업가 이대수(84)씨가 구입했다.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영조 16년) 제작된 ‘효종어보(孝宗御寶)’와 함께였다. 이씨는 오랜 협의 끝에 지난해 12월 이들 문화재 2점을 문화재청에 인도했다.

1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씨의 아들 이성주씨가 대리 참석한 가운데 대군주보와 효종어보의 기증식이 열렸다. 이씨 외에 이들 문화재 환수에 도움을 준 미주현대불교 발행인 김형근(64)씨, 아도모례원 성역화위원장인 신영근(71)씨 등이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이성주씨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는 이들을 수집할 때부터 고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이 유물 덕분에 한국 국민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조선의 자주국가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1882년(고종 19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왼쪽)와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영조 16년)에 제작한 '효종어보'(孝宗御寶)를 지난해 12월 재미동포 이대수씨(84)로부터 기증 받아 최근 국내로 무사히 인도했다고 19일 밝혔다. [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조선의 자주국가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1882년(고종 19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왼쪽)와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영조 16년)에 제작한 '효종어보'(孝宗御寶)를 지난해 12월 재미동포 이대수씨(84)로부터 기증 받아 최근 국내로 무사히 인도했다고 19일 밝혔다. [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이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19일 공개한 고종의 국새 '대군주보' 뒷면 거북 손잡이 꼬리 아래에서 ‘W B. Tom’이라는 영문 음각이 발견됐다. 해외에 밀반출된 후 소장했던 외국인이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이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19일 공개한 고종의 국새 '대군주보' 뒷면 거북 손잡이 꼬리 아래에서 ‘W B. Tom’이라는 영문 음각이 발견됐다. 해외에 밀반출된 후 소장했던 외국인이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이날 언론 앞에 첫 선을 보인 대군주보는 높이 7.9cm, 길이 12.7cm의 은색 거북이 모양 손잡이와 몸체로 구성돼 있다. 은으로 된 몸체에 은빛 도금을 한 형태다. 효종어보는 이보다 약간 더 큰 높이 8.4cm, 길이 12.6cm에 이르고 동도금 재질로 분석됐다. 특이하게도 대군주보의 거북 손잡이 꼬리 아래에서 ‘W B. Tom’이라는 영문 음각이 발견됐다. 인장 전문가인 서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국새를 입수한 외국인이 자신의 이름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존하는 국새‧어보 가운데 이 같은 개인 서명이 추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국새와 어보 모두 임금 및 왕실의 도장이지만 권위와 쓰임새가 다르다. 국새는 국가의 국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사용된다. 어보는 왕실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으로,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죽은 후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했다. 조선 시대(대한제국기 포함) 국새와 어보는 총 412점이 제작된 것으로 문화재청은 파악하고 있다. 이번에 돌아온 2점을 제외하고도 73점은 행방불명 상태다.

고종황제. [중앙포토]

고종황제. [중앙포토]

이번에 귀환한 대군주보가 뜻깊은 것은 제작 당시 조선 상황과 관련 있다. 그 전까지 고려는 명나라에서 받은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조선은 명과 청으로부터 각각 받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국새로 썼다. 그런데 고종은 일본과 이른바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은 1876년부터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 외교용 국새 총 6점을 새로 만들면서 여기에 인(印) 대신 보(寶)를 넣었다. 특히 1882년에 제작한 3종엔 ‘대군주’라는 문구까지 공통으로 넣었다. 각각 ‘대군주보’ ‘대조선대군주보’ ‘대조선국대군주보’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조선 앞에 ‘대’를 넣어 ‘대조선’을 쓴 것은 이후 ‘대한제국’ 국호로 연결된다”면서 “고종 이후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국새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제작된 국새들은 대한제국 선포 전까지 주요 조약 날인에 쓰였다. 예컨대 1882년 4월13일 작성된 조미수호통상조약 비준서엔 ‘대군주’라는 고종의 서명 아래 ‘대조선국대군주보’ 인영이 확인된다. 조선-영국 통상조약(1882), 조선-러시아 통상조약(1884년) 등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국새는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 귀환한 대군주보는 구한말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6점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난 실물이다.

1882년(고종 19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왼쪽)와 그 인영. [사진 문화재청]

1882년(고종 19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왼쪽)와 그 인영. [사진 문화재청]

국새 대군주보가 찍힌 문서.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새 대군주보가 찍힌 문서.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주 외교'를 꿈꿨던 고종의 국새는, 그러나 일제 강제병합 이후 굴욕을 함께 견뎌야 했다. 예컨대 대한제국 시기 제작됐던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등 국새 상당수는 1911년 3월3일 천황의 진상품으로 바쳐져 일본 궁내청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8.15 해방 1년 후인 1946년 8월15일 미군정이 인수해 한국에 정식 인계했다. 하지만 6‧25 전쟁 등 혼란기를 겪으면서 조선시대 국새‧어보 상당수가 누군가에 의해 밀반출돼 종적을 감췄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문화재 환수 노력에 힘입어 국새‧어보가 하나둘 귀환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기증이고 일부는 국제 수사 공조에 의한 결실이었다. 특히 2014년 4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국새‧어보 9점이 한꺼번에 반환되면서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최근엔 지난 2017년 한‧미 수사 공조를 통해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가 6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김병연 사무관은 “국새‧어보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산으로 소지 자체가 불법인 유물”이라며 “이번 환수는 제3자의 도움에다 소장자의 결심으로 이루어낸 ‘기증’이란 점에서 앞으로 더 많은 환수에 길잡이가 돼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재숙 청장은 “아직도 70여점이 외국을 떠돌거나 소재가 불명확하다”며 “하루 빨리 돌아올 수 있게 홍보물 제작 등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돌아온 문화재 2점은 20일부터 3월 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조선의 국왕’실에서 일반 관람객에게도 공개된다.

오른쪽이 1882년 제작된 국새 '대군주보' 이미지와 그 인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보인부신총수 寶印符信總數'라는 책에 수록된 것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오른쪽이 1882년 제작된 국새 '대군주보' 이미지와 그 인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보인부신총수 寶印符信總數'라는 책에 수록된 것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882년 '대군주보'와 함께 제작됐던 '대조선대군주보'(왼쪽)와 '대조선국대군주보' 이미지와 인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보인부신총수 寶印符信總數'라는 책에 수록된 것을 촬영한 것이다. '대조선대군주보'와 '대조선국대군주보'는 제작된 사실만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 소재가 행방불명 상태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882년 '대군주보'와 함께 제작됐던 '대조선대군주보'(왼쪽)와 '대조선국대군주보' 이미지와 인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보인부신총수 寶印符信總數'라는 책에 수록된 것을 촬영한 것이다. '대조선대군주보'와 '대조선국대군주보'는 제작된 사실만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 소재가 행방불명 상태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