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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의 격리, 120통의 편지…우한 교민 무사귀가 임무 완수한 박성식 단장

중앙일보

입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우한에서 귀국 뒤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서 2주간 격리됐던 우한 2차 교민 334명이 16일 전원 퇴소했다. 이날 퇴소하는 교민들을 환송나온 아산 주민들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성태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우한에서 귀국 뒤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서 2주간 격리됐던 우한 2차 교민 334명이 16일 전원 퇴소했다. 이날 퇴소하는 교민들을 환송나온 아산 주민들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성태 기자

"우한 교민들이 무사히 퇴소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합니다."

16일 오후 5시. 몇번의 통화 연결음이 지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로 때문인지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나직한 목소리엔 기쁨이 잔뜩 묻어있었다. "이제 막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는 찰나"라고 했다. 14일 만의 외식이다.

우한 교민들이 머물었던 아산 임시생활시설 정부합동지원단장을 맡은 박성식(57) 행정안전부 수습지원과장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이날 오전 10시 우한교민은 모두 퇴소했다. 아산에서 527명, 진천에서 173명이 2주간의 격리 생활을 마치고 지난 15~16일 각자의 집, 혹은 친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우한 교민들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이 이뤄졌다"고 했다.

박성식 단장 [사진 행정안전부]

박성식 단장 [사진 행정안전부]

19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한 교민들이 빠져나간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서 그는 마지막 방역작업을 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이곳에 들어왔다.

"17일 아침에 짐을 빼니까 19일 만에 집에 돌아가겠네요."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1991년 공무원이 됐다. 그가 맡은 일은 수습지원. 재난이 발생하면 현지로 달려가 그곳의 일을 말 그대로 '수습하고 지원하는' 일이 그의 몫이다. 포항 지진 때에도, 강원도 산불 때도 그는 짐가방을 쌌다.

아내와 딸, 아들은 나라에 재난이 생길 때마다 집을 떠나는 그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 외엔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도 그랬다. "가족이 속으로는 걱정했겠지만,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아서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고 했다.

19일 만에 집에 돌아가는 그에게도 걱정이 하나있다. 딸이다. 그의 딸은 병원에서 일한다. "신종 코로나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딸을 못 보게 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사진 행정안전부]

[사진 행정안전부]

120여 통의 편지, 국가와 공무원

아산에서의 19일은 그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우한교민들이 보낸 편지들이다. 신종 코로나로 인해 우한 교민들을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니, 소소한 대화들은 모두 '편지'로 이뤄졌다. 문 앞에 교민들이 편지를 써 붙이면, 현장 공무원들이 답을 해주곤 했다.

"처음에 교민 두 분이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마음을 졸였어요. 교민들이 잘 지내시는지 소통하기 힘드니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문 앞에 우한 교민들이 써 붙인 편지는 120여 통.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가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편지를 보고 목이 메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 "여기 계시면 위험할 수 있는데 죄송하고 감사하다."

교민들이 꼭꼭 눌러쓴 편지는 큰 힘이 됐다. 그는 "교민분들이 '국가에서 보듬어줘서 고맙다'고 말씀해주시고,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소하는 것을 보니 공무원이라는 것이 정말 보람 있다"고 말했다.

[사진 행정안전부]

[사진 행정안전부]

땀방울, 그리고 부정(父情)

격리 기간인 14일의 시간은 특별한 기억을 남겼다. 교민 중 세 명이 임시 생활시설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지원단은 케이크를 공수해 생일을 축하했다. 어린아이의 생일엔 장난감도 선물했다. 더러는 화장실 변기가 막혀 방호복을 입고 막힌 변기를 뚫어주고, TV가 망가져 나오지 않아 TV를 고치기도 했다.

아산에서 교민들과 함께 지낸 지원단은 총 95명. 이들은 이곳에서 똑같은 도시락을 먹고, 시설 밖을 나가지 못하는 '격리' 생활을 했다. 새벽 1시에 자고 오전 7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반복됐다. "(신종 코로나) 검사를 하면 마음을 졸이는데, 방역하시는 분들까지 마지막에 전부 다 음성이 나와 뿌듯하다"고 했다.

박 단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로 '아빠'를 꼽았다. 어린아이 둘을 돌보기 위해 자진 입소한 40대 아버지 이야기다. "중국에서 처남이 결혼하면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식에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가 퍼지면서 갑자기 이산가족이 된 거에요."

중국 국적의 엄마는 비행기를 탈 수 없어 아이들만 한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한국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빠는 박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진 입소는 그렇게 이뤄졌다.

그는 "더러 아이들과 아빠가 잘 지내는지 전화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아이들 아빠가 아내 걱정을 많이 했는데 3차 전세기 편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축하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내분이 건강하시다고 들었다"며 "전세기편으로 들어와 (남편이) 너무 행복하다고 하는데 정말 기뻤다"고 전했다.

[사진 행정안전부]

[사진 행정안전부]

14일간 갇혀 있는 교민들을 챙기는 것 못지 않게, 아니 그것보다 더 신경을 쓴 것이 혹시나 모를 전염의 가능성이었다. 2명의 확진자가 발생해서 더 긴장하기도 했다.

그는 "종이 한장도 시설 바깥으로 그냥 나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의료폐기물로 정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관리했다고 했다.

쓰레기는 매일 교민들이 봉투에 담아 내놨는데 이 봉투도 소독했다. 봉투는 박스에 넣어서 다시 비닐 포장을 했다. 포장 후 박스를 묶으면 의료폐기물 차량이 와서 당일 소각한다고 했다. 차량과 운전기사 소득도 매일 해 '과할 정도로 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한 교민들에게 각계각층에서 도움을 주고 아산시에서 잘 보듬어줘서 탈 없이 격리 기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재난이 발생하면 재난현장에서 국민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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